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9 09:17
디지털 컴퓨터 1호 ‘세종1호’

산업발전이 아니라 대통령의 도청을 막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

최초의 컴퓨터는 이만영 박사의 전자계산기 1호에서 3호지만 아날로그 제품이었고, 상업화나 양산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실제 상업적으로 사용된 컴퓨터 1호는 ‘세종1호’다.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서 만든 한국 최초의 국산 디지털컴퓨터다.

‘세종1호’ 개발 프로젝트는 청와대에 의해 ‘메모 콜(Memo Call)’이라는 암호로 시작됐다. 개발 이유는 산업발전이 아닌 정치 목적 때문이다. 1972년 4월에 청와대는 ‘청와대의 주요 기관 사이의 전화통화에 대해 외국 정보기관의 도청 가능성을 차단하면서도 언제라도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을 제어 가능한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를 1973년 3월까지 개발 가능한가.’를 KIST에 의뢰한다. 7.4남북공동상황을 전후로 한 중요한 정치적 상황에서 통신비밀이 보장되는 핫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KIST측은 2개월여 동안의 연구조사 끝에 청와대가 요구한 교환기(PABX)가 미국과 소련 등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특수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당시 유행하던 ‘노바01’이나 ‘PDP11’ 등의 미니컴퓨터를 PABX 시스템제어용으로 사용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KIST측은 ‘노바팀’이라는 비밀 개발팀을 구성한 다음에 청와대 쪽과 ‘메모콜’ 개발 프로젝트를 1972년 6월부터 시작했다. 메모콜을 위해서는 교환기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해야 했다. 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했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요한 성능 좋은 컴퓨터도 필요했다. 개발에 필요한 컴퓨터로는 ‘PDP 8/E’가 적당했는데, 주문에서 인도까지 몇 달이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개발시한은 1973년 3월이었고 청와대는 전면에 나서 지원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DG가 생산한 ‘노바01’을 3대 주문해서 연구실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어셈블리어로 통신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교환기를 위해 만들어야 했던 국산1호 컴퓨터 ‘세종1호’

문제는 노바팀이 개발한 제어용 소프트웨어가 ‘노바01’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노바팀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구현하려면 시분할 처리가 필요한데, 노바01은 시분할 처리 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분할 방식을 리얼타임으로 제어하는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해졌고 ‘세종1호’ 개발이 시도되었다.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아니었지만 컴퓨터 개발이라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세종1호는 노바01의 성능을 그대로 분석해 만들어진 호환제품이다. 다만 노바01과 다른 독자적 설계에 1KB D램을 사용하는 등 성능을 크게 개선한 독자개발 제품이었다.

노바팀은 결국 1973년 3월까지 세종1호를 이용한 PABX 시스템인 ‘K1T-CCSS’를 개발하지만 청와대는 약속과 달리 계약을 파기시켰고, KIST는 기왕 개발한 세종1호를 상용화한다. GTE사가 ‘KIST 500’과 ‘세종1호’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1977년 2월 삼성그룹과 삼성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삼성GTE사는 이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산 컴퓨터 및 TDX-1 개발의 밑거름이 된 교환기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

오리콤570 조립 성공을 소개한 1977년 기사


세종1호에 이어 동양전산기술이 1976년부터 ‘오리콤540’을, 1977년부터 ‘오리콤570’을 조립해 출시한다. 이어서 금성전기가 1976년 11월부터 1977년 7월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수체제어연구실과 공동으로 국내최초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최초의 국산 잉크제트프린터 ‘GS JET1200’ 개발에 성공한 다음 1977년 7월 6일, 서울역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 GSCOM80A 마이크로컴퓨터와 GS JET1200 잉크제트프린터, GSM 2000도트매트릭스 프린터를 발표한다. 1978년 3월부터는 한글 모아쓰기가 가능한 CRT단말기를 삼성전자가 개발한다.


[잠깐] 돈 안 준 청와대와 세종1호의 존재 공개

어렵게 ‘세종1호’를 약속 기일 안에 완성시켰으나 청와대는 신뢰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KIST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문제는 약속한 개발비용 6000만 원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 제품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허가만을 준다. 결국 KIST측은 미국 GTE사와 상용화 프로젝트를 계약 맺고 1975년 초에 ‘KIST 500’을 발표한다. ‘세종1호’의 존재가 일반에 알려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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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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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9 08:52
최초의 인터넷 논문에서 국내 첫 웹 워크숍까지

국내 최초의 인터넷 논문

인터넷의 근간이 되는 프로토콜인 TCP/IP를 국내 학회에 최초로 소개한 것은 1984년 카이스트 전길남 교수 연구팀의 연구논문이다. 전길남 교수 연구팀은 네트워크의 확장을 위해 미국 ‘BBN’사의 TCP/IP 네트워크 장비를 구매하여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3억 원이라는 고가의 장비를 학교에서 구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연구팀은 카이스트의 컴퓨터에 TCP/IP를 설치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로 하고 그 결과물을 1984년 봄, 정보과학회에 ‘4.2 BSD Kernel과 UNET TCP/IP와의 인터페이스’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타자기와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작성된 논문은 TCP/IP의 구조를 소개하고, TCP/IP와 BSD 운영체제 커널(Kernel)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연결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이야기였다. 이 논문을 시작으로 국내 학계에서도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KRnet 93’ 행사로 웹이 처음으로 소개되다.

웹에 대한 정보는 그로부터 10년 정도 뒤에 제공되었다.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1993년에 네트워크 컨퍼런스인 ‘KRnet 93(코리아넷 93)’이 개최된다. 이때  '제1회 한국학술전산망워크숍'에서 포항공대 이재용 교수의 강의를 통해 웹(Web)이 소개된다. 이재용 교수의 강의는 국내에 공식적으로 처음 웹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다. 웹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각 기관과 기업 종사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처럼 1993년부터 웹에 대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웹에 대한 정보 욕구가 컸지만 관련 서적이 없어서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지식을 모아 웹 관련 책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올라왔고, 22명의 자원 필자가 모였다. 이들이 각자 집필한 글을 모아서 1995년 2월에 182쪽 분량의 책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국내에 웹 사용법을 처음 소개한 책인《가자 웹의 세계로》이다.

1995년에 나온 ‘가자 웹의 세계로’ 개정판 내용


당시 나와 내 선배도 통신과 인터넷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몇 가지 사정으로 출간이 늦어진 점은 지금도 아쉽다. 1994년, 코넷의 소백 계정 서비스를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겪었던 문제는 인터넷에 대한 대중 설명서의 부재였다. 1994년까지는 인터넷 사용법을 다룬 책이 없었고, 1995년 초부터 번역서가 등장했다. 당시 내가 인터넷에 관한 정보를 얻은 곳은 매달 배달되던 미국의 컴퓨터잡지와 컴퓨서브CD였다. 특히 컴퓨서브CD를 통해 알게 된 웹과 NCSA 모자이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1994년에 집필했던 《김중태 통신이야기》에 웹과 모자이크에 대해 언급했고, 같은 사무실에 있던 선배는 인터넷과 웹 관련 책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는 1994년에 탈고가 되었지만 몇 가지 사유로 반년이 지난 1995년에야 내 책과 선배가 쓴 《렛츠고 인터넷》이 출간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 책들을 꺼내보면서 모자이크의 추억이 담긴 웹과 명령어 방식으로 어렵게 쓰던 이메일, 그 외 고퍼, 베로니카, 핑, 후이즈 등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도구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곤 한다.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배포된 《가자 웹의 세계로》는 인터넷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개 세미나가 제안되었고, 그 결과 1995년 3월에 충남대학교에서 600명이 모여 국내 최초의 웹 워크숍을 열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웹과 함께 한 것 같지만 IT전문가들도 겨우 1995년에야 웹의 기술을 접했을 정도로 한국 웹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그 짧은 10년 동안 웹은 우리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첫 워크숍은 100여 명 정도 모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6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해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인터넷 접속 방법, HTML 소개, 웹브라우저 사용 방법, 웹서버 설치 방법 등 지금 보면 아주 기초적인 주제들이지만 당시 첫 워크숍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선한 내용이었다. 열기도 매우 뜨거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웹이 매우 인기 있는 컴퓨팅 기술이 될 거라는 공통된 인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 웹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보급된 것은 이 워크숍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96년에는 인터넷 상에서 개최된 국내 첫 본격 학술행사인 ‘정보엑스포96(Internet Expo 96)’이 열린다. 한국은 한국전산원 주관으로 참여했는데 인터넷 웹사이트가 전시관의 기능을 하도록 구성되어 웹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정보엑스포96’에서 ‘인터넷 월드 코리아(Internet world Korea)’, ‘코리아넷(KRnet'96)’, ‘월드와이드웹 워크숍(WWW Workshop'96)’ 등의 컨퍼런스를 함께 개최하며 인터넷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잠깐] 인터넷의 하루를 기록한다. ‘e하루616’

2004년 6월에 서울의 하루 동안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진행되었던 ‘한도시 이야기’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음 커뮤니케이션즈 임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24명이 그날의 인터넷을 기록한 ‘@2004’가 진행되었고, 결과물은 모두 정보트러스트센터에 기증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5년 6월16일에 ‘e하루616’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e하루616’은 1년 중 단 하루인 6월 16일에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를 보관하는 행사다. 자신이 보관하고 싶은 사이트를 기록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함으로써 인터넷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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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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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8 09:16
벅스뮤직과 소리바다로 본 저작권 문제

스트리밍 방식의 벅스뮤직이 서비스를 시작하다

1999년 9월 ‘벅스뮤직’이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전까지 음악 서비스가 내려 받기 방식인 반면 벅스뮤직은 스트리밍 방식을 도입했다. 벅스뮤직과 같은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은 초고속통신망의 보급 덕분이다. 전화모뎀을 이용한 통신망으로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할 수 없지만 초고속인터넷망에서는 가능했다.

원하는 노래를 검색한 다음에 이를 다시 내려 받아 저장하고 듣고 싶을 때 다시 컴퓨터를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에 비해 검색어를 입력하고 바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벅스뮤직은 훨씬 편리했다. 벅스뮤직은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가서 들을 수 있는 서비스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2001년 11월부터 저작권 문제로 인한 소송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결국 무료서비스였던 벅스뮤직은 2003년부터 유료화를 진행한다. 벅스뮤직은 음원과 관련된 저작권 분쟁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벅스뮤직 관련 분쟁은 음원 관련법과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작권 문제 이후 유료 서비스로 전환한 벅스뮤직



소리바다 폐쇄 결정과 온라인의 음악 파일 삭제

벅스뮤직과 같은 논란을 일으킨 서비스로 ‘소리바다’가 있다. 2000년 5월 서비스를 시작한 소리바다는 공짜로 음악파일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되면서 네티즌에게 인기를 끌었으나 늘 저작권 문제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소리바다를 통해 P2P라는 서비스의 개념을 알았지만 정작 소리바다는 저작권 문제로 고소를 당한 후에 서비스가 정지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소리바다는 2002년 7월과 2003년 2월에 서버운영 중지 가처분 판결을 받은 바 있으며, 2003년 7월 9일에는 법원이 소리바다에 대하여 서비스를 중지하라는 취지의 가처분결정을 내린다. 이때마다 소리바다는 소리바다2, 소리바다3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서비스로 바꾸면서 법원 판결을 피해갔다. 물론 소리바다에서는 유료화 모델인 ‘MP3#’을 도입하는 등 저작권자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바다에 대한 소송을 주도했던 한국음원제작자협회(음제협)는 ‘합법과 불법의 공존이란 있을 수 없다’라면서 소리바다를 강력하게 압박했다.

이후 2005년에 ‘전송권’을 규정한 법안이 통과되면서 네티즌들은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려놓은 음악 파일을 모두 삭제해야 했다. 그러나 저작권자는 소리바다를 폐쇄하고 블로그의 음악을 삭제하는 것에만 신경 썼을 뿐 정작 블로그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는 마련하지 않았다. 시장은 만들지 않고 그나마 성장 가능한 자생적 시장마저 불법이라는 굴레로 없애버린 것이다.

전송권이 포함된 새로운 법이 통과된 이후 네티즌에 대한 대규모 고발이 연달아 이루어졌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150명의 이용자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다고 밝힌 2005년 9월 8일에서 며칠이 지난 9월 12일에는 음악산업협회가 소리바다, 파일구리 등 P2P를 통해 파일을 공유한 네티즌 1985명을 사이버수사대에 고발한 일이 일어났다. 네티즌이 이렇게 대규모로 고발된 일은 이전에 없었다. 정작 대규모 고발로 인한 정품시장 확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품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거들이 정식으로 음원을 구입해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장은 만들지 않고 고발만 했기에 저작권자의 대규모 고발 고소는 더욱 큰 반발과 더욱 은밀한 불법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에 그쳤다.

불법 논란으로 세월을 보내느라 큰 시장 놓쳐

스트리밍이나 P2P라는 기술은 이전의 저작권 개념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신기술이었다. 한국은 초고속인터넷망의 혜택을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두 기술을 잘 활용했다면 세계적인 서비스를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졌으나 기존 저작권자의 밥그릇 싸움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저작권자도 인터넷 서비스 업체도 모두 망하는 공멸의 길을 걷고 만다. 결국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음반시장은 쇠락했으나 대안을 마련하지 못 하고 10년을 보낸 것이다. 한국에서 불법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미국에서는 애플의 아이튠즈 스토어가 등장해 10억 곡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갔다. 결국 내려받기 서비스는 휴대폰 벨소리 시장으로 좁아졌고 스트리밍 서비스는 배경음악 등으로 한정되면서 음원시장의 수익은 저작권자가 아닌 이통사가 가져가는 구도가 되었고, 음원시장의 주도권도 유통업체인 이통사로 넘어가는 변화를 겪게 된다.

법무법인의 저작권 사냥으로 자살하는 청소년까지 생겨

저작권 문제는 저작권사냥꾼, 저작권파파라치라고 하는 법무법인의 저작권 무차별 고소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 음원을 올린 네티즌을 무차별 고소한 다음에 합의금을 뜯어내는 변호사를 말한다. 저작권 위반을 핑계로 경찰에 고소하면 경찰이 네티즌에게 고소 사실을 알려주고 합의보라고 말하게 되고 법무법인 직원은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저작권 고소 전문 변호사들은 값싼 아르바이트생을 이용해 미니홈피, 카페, 블로그, P2P, 웹하드, 공유 사이트를 뒤져서 한 건당 50~100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들이 진짜 문제가 되는 헤비업로더는 건드리지 못하고 저작권 개념이 없는 어린 학생을 협박한다는 점이다.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한 네티즌에는 중고생이 많은데, 아이들은 형사처벌한다는 협박과 합의금 요구에 고민하다가 자살하기도 한다. 실제로 2007년 11월에도 소설을 내려 받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고등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학생 C군은 인터넷 소설을 올렸다가 고소당한 뒤에 합의금 60만원을 내지 못해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되었다.

그런데도 돈에 혈안이 된 변호사로 인해 고소 건수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광주시 교육청이 파악한 피고소 학생만 17명으로 2007년의 연간 2건에 비해 8.5배에 달하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고, 광주지역 경찰서에 최근 1년간 접수된 저작권 관련 고소의 47%인 633건이 10대를 고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는 2007년에 2만 5000건 정도가 발생했고 2008년에는 6만 건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검찰청 자료에 의하면 2008년 6월까지 접수된 것만 해도 3만 2446건이고 이중 불기소 처분된 것이 2만 9902 건이라고 한다. 불기소 처분의 상당수가 합의금을 낸 경우임을 감안하면 일 년에 6~1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저작권파파라치에 시달린다고 볼 수 있다.

고소 건수가 증가하면서 경찰서도 쓸 데 없는 서류심사에 인력을 많이 뺏기고 있다. 한 번에 100명을 고발하는 고소장이 들어오면 경찰로서도 일단 신원을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한 다음에 모두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범 소탕에 쓸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다. 경찰서마다 하루 평균 수십 건의 고소장이 들어온다.

저작권 단속의 합리적인 정책과 공유정신이 필요

저작권 문제는 기업에도 큰 고민거리다.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SPC)가 불법복제 단속을 할 때마다 작은 기업들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을 대피시키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기업에서 정품만 사서 쓴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깐 프로그램 때문에 천문학적인 벌금을 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업들이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무료라고 해서 집에서 쓰던 프로그램을 회사에 깔았더니 기업은 사서 써야 한다면서 저작권위반으로 고발되는 일도 많다.

저작권파파라치 변호사들이 정작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를 줄이는 방향보다는 돈을 뜯어내는데 혈안이 된 것처럼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저작권 단속도 불법복제를 줄이는 방향보다는 건수를 올리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문제다. 학생들이 저작권법을 잘 몰라서 고소된 가벼운 사안인 경우에는 1, 2회 경고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법복제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쳐줄 수 있다. 또한 기업도 저작권 위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면 경과를 들어보고 경고조치와 정품으로 교체를 유도해 감당하기 힘든 벌금을 물리지 않는 정책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공개프로그램이나 오픈소스와 같은 프로젝트에 의해 무료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Creative Commons)와 같은 라이선스를 통해 콘텐츠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도 저작권 문제 해결과 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해외 네티즌은 유명한 사진 공유 사이트인 플릭커를 통해 CC 라이선스 적용을 받는 사진을 찾아내 사용하기 때문에 사진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하는 일이 적다. 한국에서도 CCL을 적용한 사진공유 서비스가 많아진다면 무료로 사진을 쓰게 될 것이고, 저작권 고소를 당하는 일도 줄 것이다. 결국 저작권 문제는 콘텐츠 및 프로그램을 무료로 공유할 수 있는 공유문화의 확산과 정품을 제 가격 내고 쓰겠다는 바른 저작권 문화에 대한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시작한 유료 음원 서비스인 뮤직샵

국내에서 음원 관련 시장이 분쟁에 휘말리는 동안에도 성공적인 서비스가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싸이월드에서 2002년 7월부터 시작한 '뮤직샵' 서비스는 배경음악 서비스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유료 서비스가 되었다. 노래 한 곡당 도토리 3.5개(350원)를 내고 배경음악을 구입하면 자신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쓸 수 있는 뮤직샵은 미니홈피 열풍에 힘입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500원으로 가격이 인상되었으나 여전히 이용자가 늘면서 2005년 11월에는 1억 곡 판매라는 기록을 세운다. 배경음음악 서비스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유료화 모델이 되면서 다른 사이트에서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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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7 08:54
인터넷경매로 시작한 옥션, 오픈마켓을 이끌다

옥션이 문을 열면서 한국에서도 인터넷 경매 서비스 시작

1998년 4월에 ‘인터넷 경매’라는 사이트가 문을 열며 한국에도 인터넷 경매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1999년 10월에 지금의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옥션은 아주 짧은 문장에서 출발한다. 당시 옥션을 구상한 이재훈 씨는 책에 나온 한 구절에 생각이 꽂힌다. “온라인으로 은행 업무를 보는 것처럼 미래에는 경매도 인터넷으로 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보고 ‘그래 이거야’를 외친 그는 미련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와 창업을 결심한다. 그때 함께 창업한 사람이 나중에 ‘원어데이’라는 한개몰을 운영하는 이준희 씨다.

당시 주변사람은 모두 이재훈 씨를 말렸다. 눈으로 보고 얼마나 낡았는지를 확인하고 사는 중고물품을 보지도 않고 누가 인터넷으로 사겠냐는 반대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확신했던 이재훈 씨는 옥션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터넷 경매 사이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건을 올리는 판매자가 없어서 두 사람은 직접 판매자를 설득해서 물건을 얻어온 다음에 자신들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상품을 대신 등록해주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옥션은 성장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1년 1월에 이베이에 인수되면서 벤처대박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현재는 이베이에 인수된 옥션(www.auction.co.kr)


경매에서 오픈마켓으로 전환

옥션은 처음에 경매를 기본 사업으로 시작했으나 경매를 이용한 거래 규모가 크지 않았다. 중고물품 거래라는 것이 아무래도 신규상품 거래보다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모델을 점차 상점을 입점시키는 오픈마켓으로 바꿔나갔다. 옥션은 2002년부터 경매와 공동구매에서 온라인마켓플레이스로 사업모델을 변경하고 2002년 2/4분기부터 흑자로 전환한다. 그렇게 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인터넷에 물건을 올리고 사고 팔 수 있는 오픈마켓 시장이 열린다.

옥션이 장악한 경매 및 오픈마켓 시장은 한동안 도전자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터파크의 사내벤처인 G마켓이 도전장을 던지면서 상황은 반전한다. 1999년에는 인터파크의 사내벤처인 구스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G마켓은 옥션보다 뒤늦게 출발한 후발주자라는 단점을 안고도 2006년부터는 옥션의 매출을 넘어서는 역전을 일군다. 다양한 쿠폰 정책과 저렴한 가격 및 빠른 결제시스템을 무기로 오픈마켓 시장의 1위가 된 것이다. 그 외 CJ의 엠플, 다음의 온켓을 비롯하여 다양한 쇼핑몰과 오픈마켓이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G마켓도 옥션에 이어 이베이에 인수되면서 현재 한국의 오픈마켓 시장은 이베이의 독과점 체제에 SK텔레콤이 오픈마켓 시장에 뛰어들면서 만든 ‘11번가’가 대항하는 형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잠깐] 오픈마켓 시장의 확대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의 활성화는 인터넷 쇼핑몰 창업을 더욱 쉽게 만들어 주고 있다. 2004년 1월 온라인 쇼핑몰 개인 사업자는 1492개 사업체에서 2006년 6월 2695 업체로 1203개 늘어 2년 반 사이 약 80%가 증가했다. 유명 연예인의 창업도 늘었고, 수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쇼핑몰 운영자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2004년에는 고등학생이 인터넷 쇼핑몰을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를 차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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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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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2 09:42
1989년의 도서주문이 쇼핑몰의 원조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PC통신의 쇼핑 메뉴 서비스에서 초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89년 10월 데이콤이 교보문고, 환은신용카드와 공동개발한 도서주문 시스템을 천리안에서 서비스한 것이 첫 사례다. 통신상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한 후 3~4일이 지나면 주문한 책이 집으로 배달됐는데 이것은 지금의 인터넷 쇼핑과 같은 형태다. PC통신 거래는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의 홈쇼핑 메뉴에서 도서주문, 음반, 컴퓨터 관련기기 판매, 예약, 민원서류 발급으로 그 서비스 범위가 확대되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된 이후에도 PC통신에서는 장터가 남아 있었고 1998년 IMF 당시에는 알뜰 중고품을 사고팔기도 했다.

PC통신 이후 등장한 전자상거래는 초기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TV홈쇼핑 카탈로그를 온라인화한 형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매자는 인터넷 모니터를 통해 물건을 고르고 그 페이지에 있는 판매자의 연락처로 전화를 한다. 구매자는 물건을 팔 수 있는지 물어보고 이름과 주소를 알려준다. 그 후 무통장 입금으로 돈을 보내면 판매자가 소포로 물건을 보내주었다.

구매자는 열린 인터넷망을 사용해서 상품을 저렴하고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었기에 우리나라 전자상거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정부에서는 전자상거래의 안전성을 위한 법률을 정하고 제도와 기구를 마련해서 전자상거래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PC통신 시절의 온라인 홈쇼핑과 온라인 예약, 온라인뱅킹 서비스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를 위한 조치들

국내 전자상거래는 포항제철이 1987년 ‘전자문서교환(EDI; Electronic Data Exchange; 통신을 통해 전자화된 서류를 주고받는 기술)’을 쓰면서 전자거래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1993년 1월 ‘한국 EDIFACT(Electronic Data Interchange for Administration, Commerce and Transport; 행정, 상업 및 운송분야 관련 전자문서교환 국제표준)위원회’는 ‘한국EDIFACT표준원(KEB)’을 만들어 전자문서의 표준을 만들고 퍼뜨리는 데에 힘썼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EC; Electronic Commerce)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실제로 소비자들이 물품을 적극적으로 구입하면서부터였는데, 1996년 인터파크의 서비스 개시가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 전자 상거래 분야의 성장 잠재력을 인지한 정부는 전자상거래를 성장시키기 위해 여러 대책을 세웠다.

통상산업부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전자문서를 개발하고 ‘전자상거래지원센터(ECRC: Electronic Commerce Resource Center)’를 만들어 ‘칼스(CALS:기업간 전자거래 computer aided logistics support, commerce at light speed)’와 전자상거래를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시범 사업을 벌였다. 특히 전자, 자동차, 건설, 국방 4개 산업 분야에서 실시한 칼스 시범사업에는 100억 이상의 예산이 쓰였다.

2000년 2월 정부기관들은 ‘전자상거래 활성화 종합대책’을 세워 2003년까지 전자상거래 선진국이 될 계획을 짰다. 그러나 정부가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전문 인력을 키우지 못해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전자상거래가 점점 늘어나면서 전자상거래 분쟁도 늘어났다. 2000년 4월부터 산업자원부는 ‘전자거래 분쟁조정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전자거래 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분쟁조정 신청 건수는 2001년 457건에서 2005년 1750건으로 4배 가까이 증가할 정도로 위원회의 일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전자상거래 활성화 종합대책’을 세운 이후 정부 부처들은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범정부적으로는 전자상거래 인력을 양성하고 정부 전자 조달을 늘리기로 했다. 2006년 4월에는 산업자원부가 ‘2006 전자거래 촉진계획’을 세워 법과 제도를 개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외에도 각 정부 부처마다 중소기업을 지원하거나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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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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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1.08 15:01

한국 최초의 컴퓨터 범죄인 반포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 사건

한국 최초의 컴퓨터 범죄는 컴퓨터 도입기인 1973년 10월에 발생한다. 바로 서울 ‘반포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사건’이다. 이전까지의 부정이 사람에 의해 발생한 반면, 이 사건은 컴퓨터로 이루어진 부정이라는 점에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큰 화제와 충격을 주었다.

반포AID차관아파트는 미국 국제개발국(AID) 자금을 이용해 짓던 대규모 아파트로 입주 신청이 몰리자 입주자 선정을 컴퓨터를 이용해 추첨하기로 한다. 이때 용역을 맡은 곳은 과기처 산하의 중앙전자계산소(NCC)였다. NCC가 추첨을 맡게 된 이유는 당시 도입된 컴퓨터 중에는 가장 성능이 좋은 ‘유니백1106’을 보유한 정부산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이라 부정이 일어날 여지도 적었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곳에서 부정이 일어난다. NCC 소속 프로그래머인 정 씨가 수십 명의 입주신청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프로그램 처리과정을 조작하여 9세대를 당첨시킨 것이다. 고발만 아니었다면 조작은 발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추첨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능력 한계로 인해 추첨과정을 저장할 수 없었다. 즉 추첨과정을 콘솔장치(프린터)에만 출력시키고 처리과정은 디스크로 보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콘솔장치의 출력만 조작하면 증거가 남지 않는 일이었다. 정씨는 25장의 조작된 프로그램카드를 끼워 넣었다가 다시 빼내는 수법으로 조작 흔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다.

이 사건이 발각된 이유는 NCC 직원의 검찰투서 때문이다. 청탁을 의뢰했던 수십 명 중 상당수가 정씨와 가까운 사람이었고 이 중에는 NCC 직원도 많았다. 실제로 부정 당첨된 9세대 중 5세대가 NCC 직원이었다. 청탁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직원이 내부고발을 함으로써 완벽했던 범죄가 드러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컴퓨터 범죄인 이 사건은 컴퓨터 운영자나 프로그래머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큰 경각심을 주었다. 결국 컴퓨터도 사람이 조작하는 도구의 하나에 불과하며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flickr - michael-kay

한국인의 부동산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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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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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1.04 14:31
2002년 겨울에 사람들은 질문형 광고 하나를 보게 된다. ‘핫이슈를 왜 뜨거운 감자라고 말할까?’ ‘산타는 왜 빨간 옷을 입을까?’와 같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 광고를 보면서 ‘맞아. 산타는 정말 왜 빨간 옷을 입는 거지?’라고 궁금증이 생겼고, 한 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 광고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광고에 등장한 서비스는 초히트 상품이 된다.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가 수면 위로 등장한 것이다.

지식인은 그때까지 일부 마니아층에서만 인기가 있던 네이버를 포털 1위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이 되었다. 지식인이 인기를 끌자 네이버는 봉태규라는 젊은 배우를 기용하여 ‘극장에서는 왼쪽 팔걸이가 내 것일까? 오른쪽 팔걸이가 내 것일까?’와 같은 질문형 광고를 계속 집행했고, 내공을 건 질문과 답변은 1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네이버는 지식인과 지식검색으로 국내 포털 1위를 달성한다

네이버의 ‘지식iN(지식검색)’은 서비스 시작 반년 뒤에 이용자가 40만 명을 돌파하고 2003년 5월에는 게시물 100만 개를, 다음 해에는 1000만 개를 돌파한다. 초기에는 학문적이거나 호기심 어린 질문이 많았지만 점차 질문의 종류는 다양해져서 ‘손오공과 슈퍼맨 중 누가 더 힘이 셀까요?’와 같은 황당한 질문이 등장하고, ‘숙제 좀 도와주세요.’를 거치더니 나중에는 ‘내일 데이트 하는데 어떤 옷을 입고 갈까요?’ ‘강남역 근처의 맛있는 중국집 좀 부탁해요’라는 개인 일상에 관한 소소한 것을 묻는 서비스로 변화한다.
‘네이버’는 초기에 올라오는 질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답하기 위해 500명의 전문가를 준비했으며, 네티즌들의 질문과 답변에는 내공을 걸게 함으로써 내공 정도에 따라 하수나 평민, 초인, 신에 이르는 8단계 등급으로 나누었다.

지식인보다 앞서 시작한 디비딕은 인기 못 끌어
사실 지식인은 '디비딕'을 보고 따라 한 서비스였다. 2000년 10월에 인터넷한겨레가 지식검색 서비스인 '디비딕(dbdic, www.dbdic.com)' 를 시작했다. 디비딕은 계속 성장하며 2003년에 엠파스로 넘어갔으나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반면 2년 후인 2002년 10월에 네이버에서 시작한 지식iN 서비스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고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에 자극받은 엠파스는 디비딕을 인수한 후에 새박사인 윤무부 교수를 앞세워 맞광고전에 나섰으나 결국 따라잡지 못했다.

지식검색 서비스를 먼저 제공한 곳은 디비딕이었지만 달콤한 과실은 먼저 치고 나가 광고전에서 이긴 네이버가 가져간 것이다. 심지어 엠파스가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를 베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정도다. 디비딕을 만들었던 한겨레신문이나 이를 인수해 네이버와 경쟁했던 엠파스로서는 참으로 아쉬울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물론 네이버 지식인 이후에는 세이클럽, 프리챌, 네이트닷컴, 야후, 다음 등에서도 지식검색이나 유사한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이미 치고나간 네이버 지식인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네이버 지식iN 에 밀려 고전하던 엠파스는 2005년 5월에 ‘열린 검색’ 서비스를 시작했다. 열린 검색은 검색 결과에 ‘네이버’ 지식인 게시판의 글을 비롯하여 경쟁 포털사이트의 게시물에 있는 것까지 검색하여 결과를 보여주는 서비스다. 열린 검색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네이버는 자사가 어렵게 쌓은 데이터베이스를 무단으로 가져가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반박했고, 엠파스는 네티즌이 쌓은 게시물인데 왜 이를 검색하지 못하고 독점하느냐고 네이버를 공격했다.

열린 검색은 네티즌 사이에서도 폐쇄적인 네이버 정책에 대한 논쟁거리를 제공하면서 양 포털의 기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2006년 6월 경 엠파스는 네이버의 지식iN 검색 결과를 ‘열린 검색’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둘 사이의 갈등을 일차 해소시킨다. 그러나 ‘열린 검색’은 인터넷의 개방성과 기업의 자산보호에 관한 경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네이버 지식인은 국내에서 네티즌들에 의해 질문과 답변이 이루어지는 참여형 서비스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자료가 부족한 한국에 적지 않은 자료를 구축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답변에 대한 신뢰를 검증할 수 있는 장치가 없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 없는 질문과 광고성 답변의 증가로 스팸성 게시물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효용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또한 검색으로 성공한 네이버가 정작 지식인 서비스의 검색을 막고 있다는 점도 풀어야할 숙제 중 하나다.

전문 지식은 전문 사이트와 커뮤니티에서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가 지식에 대한 질문답변으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아직도 전문적인 정보는 전문 커뮤니티에서 얻는 것이 효과적이며, 궁금한 것도 전문 커뮤니티에서 묻고 답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일반인이 찾는 커뮤니티는 아니지만 기관에서 운영하는 정보 사이트도 있다. 2000년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진행한 학술논문DB구축사업을 토대로 문을 연 ‘학술연구정보서비스(www.riss4u.net)’는 약 14만 편의 논문을 시작으로 꾸준하게 각종 학술지 논문이 등록되고 있는 사이트로, 국내 유명 학위 논문 요약 정보나 초록, 원문까지 제공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이 1991년부터 제공해온 종합뉴스데이터베이스 ‘카인즈(www.kinds.or.kr)’에서는 과거 국내 언론기사를 모두 검색할 수 있다. 1991년 이후 자료는 주요 신문, 방송, 주간지, 인터넷신문 등의 기사를 텍스트로 검색할 수 있으며, 그 이전 자료는 PDF 등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잠깐] 최초의 지식검색은 아나이스
그러나 한겨레 디비딕이 최초의 지식검색은 아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국 최초의 지식 검색 서비스는 nKorea의 ‘아나이스’로 알려졌다. 때문에 한겨레에서 지식검색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아나이스 인수를 희망했는데, nKorea에서 인수를 거부하자 한겨레가 아나이스 서비스를 모방해 디비딕을 만든 것이다. 아나이스처럼 네티즌끼리 질문하고 답변하는 사이트로는 애스크 존이 있고, 전문가가 답변해주는 엔위즈, 엑스퍼트. 마이라스 등도 있었다. 해외 사이트로는 www.askme.com, www.abuzz.com, www.expertcentral.co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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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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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0.27 16:29
삼보를 시작으로 한국의 PC산업 출발하다.
1980년 7월 2일. 이용태 씨를 비롯한 7명의 젊은이들이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삼보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그렇게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의 작은 사무실에서 국내 PC산업이 출발했다. 이후 삼보엔지니어링은 회사 설립 6개월 만인 81년 1월에 국내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SE-8001을 발표하면서 컴퓨터 전문업체로 성장한다.

삼보는 1981년 11월에는 캐나다에 PC를 수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82년에는 8비트 애플 호환기종인 ‘트라이잼20(Trigem 20)'을 개발한다. 또한 일본 엡손과 제휴해 프린터를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트라이젬20은 사실상 국내에 PC(IBM-PC가 아닌, 개인용 컴퓨터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PC)라는 제품을 개인에게 보급하는 첫 번째 상용제품이나 마찬가지다. 트라이젬20은 꽤 많은 수가 팔렸고, 이에 힘입은 삼보는 지면광고까지 실시한다.


삼보컴퓨터의 82년 제품인 트라이젬20. 사실상 PC보급의 견인차 역할을 한 제품이다

광고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트라이젬20은 본체 가격만 42만 9000원이었다. 여기에 저장장치, 프린터 등의 주변장치를 갖추면 그 금액은 몇 배로 뛴다. 본체 가격만 해도 당시 대학 1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중산층이 구입하기는 쉽지 않았던 제품이다.

여기서 사진 설명을 잠깐 하자. 오른쪽 위를 보면 네모난 상자 두 개가 보인다. 이것은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다. 하지만 제품의 가격이 너무 비싸 실제로 5.25인치 플로피드라이브를 구입해 사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80년대 애플 호환기종을 개인용으로 구입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테이프드라이브장치를 구입해 썼다.
왼쪽 아래의 흰 상자가 바로 테이프드라이브 장치다. 피아노건반처럼 생긴 단추 위에 오디오테이프가 들어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삼보 트라이젬 외에도 애플 호환기종을 사용했던 사람은 대부분 가격이 저렴한 테이프드라이브를 저장장치로 썼다. 따라서 64KB도 안 되는 작은 프로그램을 하나 실행시키려 해도 테이프가 다 감기는 몇십 분 동안 기다려야 했다.

프린터는 EPSON MX-80 F/T III 제품이다. 프린터 종이 좌우를 보면 구멍이 연속적으로 뚫려 있는데, 당시 프린터는 종이를 똑바로 위로 밀어내기 위해 좌우에 구멍이 뚫린 연속용지를 사용했다. 요즘 신용카드를 출력하는 용지처럼 좌우에 구멍이 나 있고 연속으로 이어진 용지를 당시 프린터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만약 구멍이 뚫려있지 않은 종이를 사용하면 올라가다가 기울어져 출력을 망치곤 했다. 또한 낱장공급장치가 없었기에 여러 쪽을 인쇄하려면 연속용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보급의 선두주자였던 청계천 상가들
1980년대 초반에 국내 PC는 주로 삼보컴퓨터 및 애플의 국내 총대리점인 ‘한국소프트웨어’와 ‘엘렉스 컴퓨터’에서 공급했는데 한국소프트웨어와 엘렉스는 나중에 삼보컴퓨터에 인수된다. 이들 3사 외에 업체로 희망전자, 홍익컴퓨터, 로얄컴퓨터, 에이스컴퓨터, 골든벨, 한국마이컴, 브레인컴퓨터, 석영전자 등이 조립PC를 판매하는 업체들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이 청계천 조립1세대로 국내에 수입되던 컴퓨터 및 조립PC를 학생들에게 공급해주던 역할을 했다.
당시 PC공급을 청계천의 작은 가게들에 의존했던 이유는 대기업이 끼어들기에는 시장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광고를 보면 1982년부터 1983년 말까지 삼보컴퓨터는 트라이젬 시리즈를 6000대 가량 판매했으며, 이 중 개인이 구입한 것이 1000대임을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1000명이라면 내가 사는 관악구에 불과 몇 명만이 이 컴퓨터를 소유한 셈이다.

삼보컴퓨터의 트라이젬20 성공에 자극 받은 여러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애플 호환기종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보컴퓨터의 성공에 자극 받아 다른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의 국내 대기업도 속속 PC시장에 진출했다.
삼보는 국내 PC시장을 석권한 데 이어 해외시장에서도 수출물량을 늘려나갔다. 일본과 미국에서 선보인 저가 PC 이머신즈와 소텍 제품은 한때 판매율 1~2위를 다툴 정도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저가정책은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했다. 삼보컴퓨터는 25년 만인 2005년 5월 18일에 법정관리를 발표하면서 국내 컴퓨터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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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0.25 11:41


인터넷쇼핑몰, 인터파크의 등장으로 시작

1996년 6월에 데이콤은 국내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를 시작한다. 같은 해 롯데닷컴, 1997년의 신세계, e현대(www.hmall.com), 한솔CS클럽,삼성몰이 문을 열었고, 1998년에는 온라인서점인 예스24와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옥션이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오프라인에서 유통망을 가지거나 매장을 가진 기업들이 인터넷 쇼핑몰에 진출했다. 이미 유통망과 창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추가로 판매가 이루어지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인터넷으로만 쇼핑을 하겠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으며 초고속통신망도 등장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파크는 오프라인 매장이 없는 인터넷 전용 쇼핑몰로 첫발을 내딛었다. 오프라인 매장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건 유통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고객에게 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택배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이라 빠른 배달을 위해 직원들이 퇴근하면서 주문 들어온 물건을 들고 고객집으로 방문해 직접 전달해야 했다. 인터파크나 롯데닷컴은 그렇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면서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눈으로 보지도 손으로 만져보지도 않고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물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규격이 정해진 공산품 위주로 쇼핑몰이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류와 같은 제품은 입어볼 수 없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터넷 쇼핑몰이 생활화된 지금은 의류잡화가 인터넷 쇼핑몰 시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물건 종류가 다양해졌다. 이제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국내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

PC통신의 온라인 쇼핑몰 경험이 있었기에 인터파크 탄생 가능

1994년의 천리안 온라인 쇼핑몰 광고와 인터파크 시작 전인 1996년 2월의 천리안매직콜 홈쇼핑 카타로그
인터넷에서는 인터파크가 1호 쇼핑몰로 기록되었지만 사실 온라인 쇼핑몰은 PC통신 시절부터 계속 존재했다. 간단하게는 도서주문에서 스타킹, 가방, 장난감까지 다양한 제품을 판매했다. 인터파크가 데이콤에서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리안에서부터 꾸준하게 축적된 온라인쇼핑몰의 경험 덕분이다. 천리안은 1990년대 초반부터 꾸준하게 온라인쇼핑몰 사업을 벌였다. 1994년 8월 1일에는 신세계 백화점이 국내 백화점 최초로 천리안을 통해 쇼핑몰 서비스를 시작했다. 온라인입금 외에 외환비자카드로 신용카드 결제도 가능했다. 천리안 소식지에 온라인쇼핑몰 광고를 계속 실었으며, 1996년에는 ‘천리안 매직콜 홈쇼핑’이라는 별도의 부록책을 발간할 정도로 쇼핑몰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이렇게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파크라는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PC통신의 온라인쇼핑


단 돈 몇만 원이면 온라인에 인터넷 상점을 가질 수 있는 시대
인터넷의 모든 분야가 그랬던 것처럼 초기에는 쇼핑몰을 만드는 일이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신청만 하면 쇼핑몰을 만들거나 입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옥션이나 G마켓에 입점해 물건을 파는 점주도 많아졌고, 메이크샵이나 카페24와 같은 EC호스팅 업체를 통해 쇼핑몰사이트를 대여 받아 쇼핑몰을 운영하는 점주들도 많아졌다. 또한 각종 결제시스템의 발전과 택배의 발전은 수많은 소호업체를 탄생시킨 주역이 되었다.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현재 무료로 독립적인 쇼핑몰 개설이 가능하며 재고까지 포함할 경우 200만 원 정도 수준이면 의류 쇼핑몰 운영이 가능하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 창업은 동대문에서 1만 원 짜리 100벌 이상을 재고로 구한 다음에 월 몇만 원 수준의 쇼핑몰 임대료를 내면서 운영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수억 원이 들어가는 오프라인 상점의 보증금이나 말썽 많은 권리금 문제없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에 가게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잠깐] 인터파크를 만든 업체는 이네트
국내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인 인터파크는 ‘이네트(enet)’라는 벤처회사가 구축했다. 이네트는 'Commerce 21'이라는 전자상거래 솔루션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업체로 국내 인터넷 쇼핑몰 소프트웨어 시장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네트의 성공으로 쇼핑몰 솔루션 시장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메이크샵 카페24와 같은 대형 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IT사100파콤222에서미네르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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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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