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e비즈북스 2012.05.30 13:39

<대한민국 IT사 100>에 이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서 당연히 전길남 박사님도 아시는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http://media.daum.net/digital/newsview?newsid=20120530110924054


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KIET, 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수십 명의 눈길 속에 키가 하나씩 눌러지고 마침내 화면이 뜨자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 사이의 인터넷이 개통된 것이다.
1982년 3월 2일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중형 컴퓨터와 당시 구미에 있었던 전자기술연구소의 중형컴퓨터를 1200bps 전용선으로 연결했다. 이 전산망을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이라 불렀고 이것이 한국 전산망의 시작이자 한국 인터넷의 시초다. SDN이 한국 인터넷의 시초인 이유는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TCP/IP 및 FTP, Telnet 등의 응용 프로토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월 15일, 마침내 서울과 구미 사이가 관통되면서 대한민국은 인터넷 원조인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인터넷 나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도 아닌 한국이 세계 두 번째 인터넷 국가가 된 것은 전길남 박사 덕분이다.


<대한민국 IT史 100>에서 발췌


참관인이 여러명 있었으니 누군가는 기억할 것 같은데 교차 검증을 해봐야 할 것같습니다. 5월15일이면 스승의 날이니 기억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IT사 100>의 저자이신 김중태 원장님께서도 한국의 IT 기록들이 부정확한 것들이 많다고 하셨는데 이런 역사적인 날도 이렇습니다. 이 책에서도 날짜같은 것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관계자분들께서는 그런 부분이 있으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책 내용을 계속 인용해보죠.

폐쇄적인 미국 인터넷을 세계인의 인터넷으로 바꾼 SDN
1983년에는 전길남 박사가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기면서 카이스트도 1983년 1월부터 SDN에 합류했다. 1983년 11월에는 SDN의 관리를 위해 카이스트에 네트워크 운영센터를 설치했다. 1987년에는 20여 개의 기관이 SDN에 연결되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카이스트에 설치되었던 네트워크 운영센터는 1987년 8월에 KAIST 외에도 한양대, ETRI, 데이콤 등 4개 기관으로 확대․설치되었다. 규모에 걸맞게 SDN을 통한 정보교류도 점점 활발해지면서 한국의 정보교류망 역할을 했다.


1983년 8월에는 네덜란드의 MCVAX, 10월에는 미국 HP연구소에 연결되면서 미국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미국 연결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의 보물창고였기 때문에 라우터 하나도 구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라우터는 흔한 장비지만 당시에는 미국과 동맹국을 맺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부 국가인 영국, 캐나다 정도에만 제공되었고, 공산권과 인접한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북한과 적대국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미국 정부는 기술 유출을 우려해 라우터 판매를 불허했다. 연구비가 없기 때문에 라우터 장비를 만들 수도 없었고, 결국 소프트웨어 방식으로 라우터 기능을 구현해 SDN을 미국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SDN은 폐쇄적인 미국의 인터넷 정책을 세계인의 인터넷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도 제공했다. 1986년 SDN 연구원은 X.25프로토콜을 통해 전용선 없이도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래서 미국 NIC에 IP주소 할당을 신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NATO 가입국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 외 국가의 인터넷 IP주소 할당은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을 운영하던 미국 과학재단은 인터넷을 세계에 개방하여 운영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아쉬운 것은 정작 개방 정책의 혜택을 먼저 누린 곳은 한국이 아닌 독일, 일본, 호주 등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비용을 이유로 1990년에야 직접 연결할 수 있었다. 1년 비용이 20만 달러(당시 2억 원)인데 그때까지도 인터넷의 필요성 자체를 이해 못한 한국 정부는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 기술의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한 한국통신이 이 비용을 부담했다.

1990년 4월에는 카이스트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하와이 대학과 56Kbps 전용선으로 연결했는데, 이를 위해 하나(HANA) 기구를 설립하고 하와이와 연결된 망을 ‘HANA망’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국내 인터넷망은 SDN으로 부르고, 해외 인터넷에 연결된 망은 하나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인터넷이 세계와 연결된 것이다.


참고로 한국 인터넷 개설 역사의 연표입니다.


[연표] 한국의 인터넷 개설 역사

1982년: 3월 2일에 SDN 망 연결

1982년: 5월 15일에 텔넷 로그인 성공

1983년: 1월에 ‘KAIST’가 SDN에 연결됨

1983년: 8월에 네덜란드와 연결

1983년: 10월에 미국 HP연구소와 연결

1983년: 11월에 SDN의 관리를 위해 ‘KAIST’에 네트워크 운영센터를 설치

1990년: 4월에 하와이와 연결되며 하나망 구축



대한민국 IT사 100

저자
김중태 지음
출판사
e비즈북스 | 2009-10-2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한국은 어떻게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개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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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1.07.01 11:45


싸이월드가 문을 열다.

1999년 9월 1일에 커뮤니티 서비스 싸이월드(www.cyworld.com)가 오픈했다. 지금은 한국 최고의 커뮤니티 사이트로 성장하면서 각종 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싸이월드지만 한 동안은 작은 사이트에 불과했다. 싸이월드가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인 ‘미니홈피’를 선보인 것은 2001년 9월 17일. 미니홈피는 기존의 커뮤니티를 획기적으로 바꾼 개념이다. 가장 큰 변화는 카페에 모여 집단으로 활동하며 남들이 올린 자료를 보던 커뮤니티가 개인 위주의 1인 커뮤니티, 자신의 공간에서 보여주는 1인 매체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프리챌의 유료화 파동 이후 급성장한 뒤에 SK커뮤티케이션즈에 합병되면서 그 힘이 더욱 커졌다. 이제는 싸이월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미니홈피를 선보인 지 만 3년 만인 2004년 9월에는 싸이월드 가입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서비스 시작도 9월, 미니홈피 시작도 9월, 1000만 돌파도 9월이니, 9월은 싸이월드와 인연이 깊은 달이라 할 수 있다.

프리챌 지고 싸이월드 뜨다
싸이월드가 미니홈피 1위를 하기 전에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커뮤니티 사이트는 다음 카페와 프리챌(www.freechal.com), 세이클럽 등이었다. 다음 카페는 동아리 성격을 지닌 반면 세이클럽은 싸이월드와 거의 모양이 같은 미니홈피를 서비스했다. 특히 프리챌은 충성도 및 아바타 등의 다양한 아이템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던 중이라서 향후 기대되는 커뮤니티였다. 그러나 프리챌은 2002년 11월 14일에 유료화를 밝히고 이를 기점으로 몰락하고 만다. 사실 프리챌 유료화의 문제는 유료화 자체가 아니라 접근방법의 문제였다. 프리챌이 기존의 서비스를 그대로 무료로 유지하면서 신규 기능을 내세우고 새로 나온 기능만 유료로 제공했어도 유료화는 충분했던 상황이었다. 그만큼 프리챌의 사용자 충성도가 높았고, 유료화에 대한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프리챌은 커뮤니티 사이트로는 드물게 월 13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리챌은 유료화를 발표하면서 유료화되지 않는 커뮤니티의 자료는 모두 삭제하겠다고 말한다. 이 발표가 프리챌 유료화에 대한 반발을 불렀다. 커뮤니티라는 것은 수 년 동안 동아리 지기의 땀과 동아리 회원의 협력으로 일군 결과물이다. 또한 이런 결과물 덕분에 커뮤니티 사이트가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 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자료를 삭제하겠다는 프리챌의 고압적인 자세는 회원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렀고, 안티프리챌 사이트를 등장시켰으며 많은 커뮤니티가 떨어져나가는 계기를 제공했다.
프리챌 유료화 반발 운동은 생각보다 거셌고 상대적으로 싸이월드가 가장 큰 덕을 봤다. 싸이월드의 클럽 개설 수가 2000개 이상 증가한 것이다. 싸이월드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세이클럽, 카페24 등도 덕을 봤다. 결국 프리챌 유료화는 시장 1위인 프리챌에게는 몰락의 시작이 된 반면 싸이월드에게는 시장 장악의 전기가 된다.




[잠깐] 아이러브스쿨의 부상과 몰락
인터넷 거품 때 가장 유명한 커뮤니티 서비스 중 하나는 동창생 찾기 서비스인 아이러브스쿨(www.iloveschool.co.kr)이다. 1999년에 설립된 아이러브스쿨은 한동안 국내 인터넷 서비스에서 최고의 화제였다. 친구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10년 만에 아무개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술자리의 기본 안주였을 정도였다. 신문에는 연일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만난 동창들이 불륜관계로 발전한다는 기사가 넘쳤다. 그만큼 아이러브스쿨은 화제의 사이트였다.
아이러브스쿨은 개방성만 추가해 인맥교류 사이트로 전환했다면 최근 성장한 미국의 페이스북처럼 멋진 SNS 서비스로 발전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그러나 동창생에서 머문 것이 패인이 되었다. 일관된 정책을 펴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2000년에 야후로부터 700억 원의 인수 제의를 받을 정도로 잘 나갔을 때 팔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되었다. 결국 2001년에는 119억 원을 출자한 서울이동통신에 인수되지만, 2001년 한 해 동안에만 3차례나 경영권이 바뀔 정도였으니 서비스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이러브스쿨은 창업자인 김영삼 사장과 정현철 금양 사장, 서울이통의 박차웅 사장, 새로 부임한 김상민 사장, 현명호 사장 등이 얽히고설키는 경영권 싸움에 휩싸이면서 몰락을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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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1.01.10 10:09
닌텐도에 맞서려는 한국산 게임기

게임기 열풍이 불었던 1990년을 그냥 보낸 일은 아쉬워


닌텐도는 현재 닌텐도DS와 닌텐도Wii(위)라는 게임기로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이다. 국내에서도 닌텐도 이야기는 정치권에서까지 언급될 정도여서 닌텐도에 대항할만한 게임기를 우리도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외국산 게임기에 맞서기 위한 게임기 개발은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1990년을 전후로 한국에는 TV에 연결해 사용하는 비디오게임기 보급 열풍이 분 적이 있다. 패밀리게임기 또는 패미컴, 슈퍼콤이라고 부르는 비디오게임기는 당시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하나씩 다 보급될 정도로 유행이었다. 국내 전자업체라면 모두 게임기 판매에 뛰어들었고 TV에는 게임기 광고가 쏟아졌다. 삼성의 수퍼알라딘보이와 현대 슈퍼컴보이, 대우전자 재믹스PC셔틀 등 다양한 회사에서 게임기가 쏟아졌다. 그때 내 친척이 다니던 해태전자에서도 바이스타라는 16비트 게임기를 만들었을 정도로 당시 열풍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 열풍이 국산게임기 개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만약 그때 조금 더 게임기 개발에 집중했다면 국내에서도 좋은 비디오게임기가 등장했을지 모른다.

닌텐도에 맞서려는 GP2X와 열악한 소프트웨어 환경

그러나 국산 게임기 개발에 도전하는 업체들이 최근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임베디드 리눅스 기반 휴대용 비디오게임기 개발사인 게임파크홀딩스가 개발한 휴대용 게임기 GP2X 시리즈가 대표적으로 GP2X는 2008년에 약 15만 대 정도의 판매를 기록했다.

사실 GP 시리즈는 2001년부터 출시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1년에 휴대용 게임기인 GP32가 발표된 것이다. 당시 GP32는 닌텐도 GBA보다 우수한 성능에 개발툴까지 공개하여 멀티미디어 플레이어와 각종 콘솔 게임 에뮬레이터, 그리고 사용자들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용도로 인해 어느 정도 인기를 모았었다. 몇몇 서드파티 게임 제작사에서도 전용 게임이 여럿 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닌텐도와 같은 거대 게임회사의 기기와 상대할 수는 없었고 우리나라와 유럽 쪽의 해커들 위주로 틈새시장을 형성하는데 그쳤다.

결국 후속기종을 내놓지 못하고 혼란을 겪다가 제품 생산을 맡았던 파트는 게임파크로 남고 마케팅을 맡았던 파트가 게임파크홀딩스로 독립한다. 그 후 게임파크는 GP32 후속기로 본격 휴대용 게임기라는 XGP의 개발에 착수했고, 게임파크홀딩스에서는 PMP기능을 강조한 GP2X라는 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선보이며 둘은 각각 별개의 노선을 걷게 된다..

게임파크홀딩스가 내놓은 GP2X는 사실 휴대용 게임기로 팔린 것이 아니다. '깜빡이 학습기'라는 이름의 학습용 PMP로 팔린 것이다. 그러다가 정부의 닌텐도 언급이 나오자 GP2X Wiz라는 제품으로 출시하는 것이다.

한국산 게임기로 도전장을 내고 있는 GP2X WIZ

겜브라스도 휴대폰 게임 이용한 시장 따로 게임 준비

한편 갈라섰던 게임파크는 XGP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망했고, 그 후 겜브라스라는 회사로 바뀌어 '딩키'라는 제품을 만들었다. 이후 TU미디어와 공동 개발을 통해 휴대폰용 모바일 게임 콘텐츠를 주력으로 공급하고, 이후 위성DMB 네트워크와 연동된 콘텐츠 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TU미디어는 겜브라스와 공동으로 한국게임산업진흥원 글로벌 게임허브센터의 10대 과제 중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 다중플랫폼 구축` 분야에 선정되면서 한국형 닌텐도를 꿈꾸며 개발을 진행하게 된다. TU미디어는 새로운 게임을 개발할 소프트웨어 환경이 구축되지 않았지만 이미 기존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2000종에 달하는 휴대폰용 게임 콘텐츠를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 닌텐도와 차별화하기 위해 실시간 방송 연동형 게임을 개발하고 휴대용 기기(휴대폰, PSP, 넷북, MID 등) 간 근거리 네트워크 게임도 공동 개발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향후 위성DMB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 게임과 쇼핑을 집중 육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티유미디어는 사업 초기부터 앱스토어를 구축해 개방형 시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개발자 지원 사이트를 만들고 개발 소스 코드를 공개해 영세한 모바일 게임 업체도 손쉽게 위성DMB와 결합된 휴대용 게임 콘텐츠 개발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뿐만 아니라 게임기도 진동모터, 패턴인식, 멀티터치, 동작센서, 음성인식 등의 기능을 탑재해 닌텐도나 소니 휴대용 게임기와 경쟁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닌텐도와 같은 게임기는 하드웨어 개발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하드웨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뛰어난 소프트웨어인 게임이 없으면 하드웨어 자체가 보급되지 못한다. 환경도 중요하다. 정품 게임을 구입하려는 게이머들의 바른 정품문화도 필요하다. 창의적이면서도 열정적인 개발자도 많이 등장해야 한다. 때문에 국내 패키지게임시장과 비디오게임 시장이 전멸한 환경에서 좋은 성능의 하드웨어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닌텐도DS나 닌텐도Wii와 같은 게임기가 나오려면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이 먼저 필요하다. 더불어 국민들의 정품 사용 인식 향상도 필요하다. 그런 후에 국산 게임기가 나온다면 한국에서도 닌텐도와 같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정말 독특했던 바코드배틀러
국내에 나온 게임기 중에서 독특함으로 잊히지 않는 제품이 있다. 바로 ‘바코드배틀러’라는 게임기다. 이 게임기 소개를 보면 ‘모든 상품에 표시되고 있는 바코드를 캐릭터(전사와 마법사)와 아이템으로 변신시켜 싸우는 경이의 아이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정말 경이적인 아이템이었다. 바코드배틀러는 본체 외에 주인공카드, 적카드, 화이트카드, 공략본 등으로 구성되어 7만 7000원에 팔렸다. 구성 내용을 보면 훗날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끈 유희왕과 비슷하다.

현실 확장 게임인 바코드배틀러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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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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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30 10:21
웜바이러스로 인터넷 대란 발생

1.25 인터넷 대란 발생

2003년 1월 25일 윈도 서버(MS SQL서버 2000)의 취약점을 활용한 슬래머 웜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웜바이러스로 인해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ISP의 일부 DNS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에서도 유선 인터넷은 물론이고 무선 인터넷과 행정전산망까지 모두 불통되는 사상 초유의 인터넷 재난이 발생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2003년 2월 18일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조사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내에는 전 세계 감염대수 7만 5000여 대의 11.8%에 해당하는 8800여 대가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시작은 미약했다. 2003년 1월 25일에 한국통신 혜화전화국의 DNS(Domain Name System)에 처리 가능한 용량 이상의 대량 데이터가 유입되면서 '1.25 인터넷침해사고'가 시작되었다. '1.25 인터넷침해사고(인터넷 대란)'는 고작 크기가 367 바이트에 불과한 'SQL슬래머' 라는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데이터베이스의 보안 취약점을 악용하여 네트워크에 흘러들어가는 데이터 전송량을 급증시킨 것이다. 그 결과 오후 2시부터 모든 인터넷접속이 9시간가량 마비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슬래머 웜바이러스 이후에도 2003년 8월 12일의 블래스터 웜(Blaster worm)을 시작으로, 18일의 웰치아 웜(Welchia worm), 그리고 엄청난 양의 스팸 메일을 보내고 있는 소빅.F 웜(Sobig.F worm)에 이르기까지 한 주 사이에 강력한 웜 세 종류가 한꺼번에 공격하는 일이 발생해 국내 전산 담당자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flickr - Joffley


사이버 대란에 대한 경각심 일깨운 사건

1.25 인터넷침해사고는 이미 사회적 생활의 상당부분을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한 순간에 인터넷이 마비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고 정부와 민간 기업에 경각심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로, 정부는 인터넷침해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수립, 시행해왔다. 보안에 대한 취약성과 관리소홀 방지를 위한 국가사이버안전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또한 인터넷진흥원에 일부 인터넷 선발국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최상위도메인네임서버(Top Level Domain Server)를 유치하여 국내DNS의 효율적인 관리기반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와 더불어 정보의 안전한 유통을 위한 정보보호에 필요한 시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98년부터 운영했던 한국정보보호진흥원(www.kisa.or.kr)의 업무를 보다 강화하여 신종 인터넷 정보침해사고방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침해사고가 일어난 1년 뒤인 2004년 1월에는 국가사이버안전센터(www.ncsc.go.kr)가 설립되었다. 국가사이버안전센터는 사이버공격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고, 국가전반의 정보보안업무를 담당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잠깐] 이은주 씨 자살 소식으로 인터넷 속도 저하 현상 발생

2005년 2월 22일에 영화배우 이은주 씨 자살 소식이 전해지자 한 동안 국내 인터넷 속도가 크게 느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특히 포털이나 뉴스사이트 쪽은 트래픽 문제로 화면이 느리게 뜨거나 아예 안 뜨는 곳이 생길 정도였다. 일부 사이트는 관리자 화면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서버에 부담이 심했다. 인터넷구더기(인터넷웜)이나 바이러스, 통신선로의 문제 등이 아닌 순수하게 사용자 트래픽으로 인해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은주 씨 자살 소식으로 인한 국내 인터넷 속도 저하현상은 연예인에 대한 국내 네티즌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사실과 신문이 아닌 인터넷으로 뉴스를 얻는 인터넷 시대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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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22 09:37
8비트 키드를 만든 애플과 MSX

애플, 삼보, MSX와 교육용PC

최초의 PC인 애플이 발표된 이후 시장에는 다양한 PC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PC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고 단지 기종 이름만 사용됐었다. 당시 국내에서 보급되던 PC는 ‘SPC-1000’과 ‘패미콤’을 비롯한 국내 5개 사의 교육용 PC와 애플II, IBM-PC, MSX 등 크게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그 외 탠디의 ‘TRS80’ 미국 오스본의 ‘오스본’, 삼보의 ‘SE8001’, 코모도어, 아타리 등도 등장했다.

이 중에서도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던 제품은 역시 MSX였다. 국내에서 MSX가 인기를 끈 이유는 MSX에서 돌아가는 일본산 게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애플과 삼보 트라이젬의 경우 성능은 좋지만 워낙 고가품이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고, IBM-PC는 더 비쌌다. 또한 IBM-PC는 기업용이라 학생들이 좋아할 소프트웨어가 많지 않았다. SPC-1000을 비롯한 교육용 PC는 가격이 싸서 많이 구입했지만 MSX처럼 게임이 많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MSX 기종이라는 아이큐1000. 애플과 마찬가지로 게임용으로 주로 사용했다.

부모들은 교육용컴퓨터라고 해서 사줬지만 아이들은 컴퓨터를 게임기로 사용했다. 1980년대에 보급된 애플II, MSX, MSXII를 업무용이나 프로그램 개발용으로 사용한 아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이 자라서 8비트 키드라고 하는 국내 IT산업의 중추 인재가 된다. 이들은 애플과 MSX, SPC-1000 등의 보급으로 컴퓨터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학습’이라는 컴퓨터잡지를 보면서 개발자의 꿈을 키웠다.

어느 기업이나 만들 수 있는 공개규격 PC였던 MSX

삼보와 애플, IBM의 구도 사이에 등장한 MSX는 사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상한 존재였다. MSX는 1983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ASCII)가 공동 주창해 제정한 표준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PC다. MX는 표준규격으로 공개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만들 수 있는 PC규격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본체, 키보드, 화면, 주변장치 인터페이스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 점은 다른 PC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MSX는 두 가지 특징을 지녔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관여한 탓에 어떤 기종에서도 소프트웨어가 호환되었다. 즉 어떤 회사에서 설계하더라도 표준 규격대로 만들면 모두 호환이 되었다. 또한 PC 설계에 대한 특허료를 받지 않고 설계 규격을 공개한 공개용 PC라는 점이 큰 특징이다. 때문에 모든 가전회사가 MSX 컴퓨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 컴퓨터의 하드웨어 규격을 공개한 이유는 이 두 업체가 하드웨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는 전 세계 기업이 생산하고 두 기업은 어떤 MSX 기종에서도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해 수익을 얻겠다는 것이 전략이었다.

설계에 참여한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IBM-PC용이던 베이식, C, 코볼, 멀티플랜, PC-DOS 등을 MSX용으로 수정해놓은 상태였다.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하드웨어가 판매되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는 MSX를 가정용PC라는 주제로 접근시킨다. 그래서 ‘홈 퍼스널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MSX를 홍보했다. 일본이나 한국의 가전회사들이 MSX 생산에 뛰어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전략은 예상대로 진행되어 표준규격 발표 3개월 만에 미국과 일본에서 50여 개의 하드웨어업체가 MSX를 생산하는 성과를 거둔다. 국내에서도 1983년 11월부터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이 MSX 생산에 뛰어들었고, 1984년 3월부터 제품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가전 3사의 힘 덕분에 MSX는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몇 년 동안 학생들의 최고 인기 품목이 된다. 그러나 IBM-PC가 교육용 PC로 결정되면서부터 MSX와 애플은 빠르게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잠깐] 8비트 키드가 IT 주역으로 등장할 때는 모두 20대

1980년대 학생이던 8비트 키드가 IT 주역으로 등장한 시기는 1990년을 전후해서다. ‘아래아한글’의 이찬진, ‘한글2000’의 강태진, V3의 안철수, ‘한메타자교실’의 김성수, ‘한글도깨비’의 최철룡, ‘이야기’의 이영상 ‘폭스레인저’의 남상규, ‘퓨처 TCP’의  김광태 씨 등이 모두 20대에 역사에 남을 프로그램을 가지고 등장했다. 이들 대부분은 386 세대라 부르는 60년대 생이었고, 80년대에는 10대였다. 그래서 8비트 영맨이라는 말은 없고 8비트 키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대한민국IT사100파콤222에서미네르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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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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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15 08:38

e비즈북스에서 매달 셋째 주 수요일에 원어데이(★오늘만 반값☆) 이벤트를 실시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 이달의 할인 도서 ★ 

 
<대한민국 IT사 100>

 파콤222에서 미네르바까지

 



 

김중태 지음 | e비즈북스 | 22,000원 → 11,000원 (배송비 무료)

 

 

 

한국은 어떻게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개통할 수 있었을까?

100장면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IT 역사 다큐멘터리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1962년에 컴퓨터를 자체개발했으며,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개통한 국가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우리가 몰랐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IT 역사를 재발견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이 지금까지 거쳐 온 IT 4대 분야인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

문화 분야의 역사를 아우르고 주요 인물들의 발자취를 추적, 40여 년간에 걸친

한국 IT계의 도전과 성과를 100가지 이야기 형식으로 재조명하여 흥미롭게

풀어낸다.


또한 IT 전문가인 저자는 평생에 걸쳐 축적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동안 잘못 알려진

IT 사료를 바로잡고 언론과 관련 연구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은 사실들을 이 책을

통해 공개하여 IT사 연표로 정리했다.

《대한민국 IT사 100》을 한 장면씩 읽어나가다 보면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IT의 발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벤트 일시 ★

2010년 12월 15일(수)
(*) 이벤트는 당일 자정(12시)에 마감합니다.

 

 

 

★ 참여 방법 ★

1. 아래 메일 주소로 구매를 원하시는 도서명, 본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보내주세요.
ebizbooks@hanmail.net (*) 메일 제목에 [원어데이]라고 적어주세요.

[예]

메일 제목 : [원어데이] 대한민국 IT사 100 구입 신청합니다

이름 : 홍길동

구매할 책 : <대한민국 IT사 100>

주소 : 서울시 관악구 인헌동 1111-11 2층

연락처 : 011-1111-1111

 

2. 다음날(16일 목요일) 메일 확인 후 송금하실 금액과 함께 송금계좌를 알려드리는 메일을 보내드립니다.

 

 

 

★ 배송 및 파본 관련 유의 사항 ★

1. 배송비는 무료입니다. (산간도서지역, 해외배송은 불가)
2. 입금 확인 후 바로 배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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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9 09:17
디지털 컴퓨터 1호 ‘세종1호’

산업발전이 아니라 대통령의 도청을 막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

최초의 컴퓨터는 이만영 박사의 전자계산기 1호에서 3호지만 아날로그 제품이었고, 상업화나 양산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실제 상업적으로 사용된 컴퓨터 1호는 ‘세종1호’다.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서 만든 한국 최초의 국산 디지털컴퓨터다.

‘세종1호’ 개발 프로젝트는 청와대에 의해 ‘메모 콜(Memo Call)’이라는 암호로 시작됐다. 개발 이유는 산업발전이 아닌 정치 목적 때문이다. 1972년 4월에 청와대는 ‘청와대의 주요 기관 사이의 전화통화에 대해 외국 정보기관의 도청 가능성을 차단하면서도 언제라도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을 제어 가능한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를 1973년 3월까지 개발 가능한가.’를 KIST에 의뢰한다. 7.4남북공동상황을 전후로 한 중요한 정치적 상황에서 통신비밀이 보장되는 핫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KIST측은 2개월여 동안의 연구조사 끝에 청와대가 요구한 교환기(PABX)가 미국과 소련 등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특수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당시 유행하던 ‘노바01’이나 ‘PDP11’ 등의 미니컴퓨터를 PABX 시스템제어용으로 사용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KIST측은 ‘노바팀’이라는 비밀 개발팀을 구성한 다음에 청와대 쪽과 ‘메모콜’ 개발 프로젝트를 1972년 6월부터 시작했다. 메모콜을 위해서는 교환기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해야 했다. 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했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요한 성능 좋은 컴퓨터도 필요했다. 개발에 필요한 컴퓨터로는 ‘PDP 8/E’가 적당했는데, 주문에서 인도까지 몇 달이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개발시한은 1973년 3월이었고 청와대는 전면에 나서 지원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DG가 생산한 ‘노바01’을 3대 주문해서 연구실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어셈블리어로 통신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교환기를 위해 만들어야 했던 국산1호 컴퓨터 ‘세종1호’

문제는 노바팀이 개발한 제어용 소프트웨어가 ‘노바01’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노바팀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구현하려면 시분할 처리가 필요한데, 노바01은 시분할 처리 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분할 방식을 리얼타임으로 제어하는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해졌고 ‘세종1호’ 개발이 시도되었다.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아니었지만 컴퓨터 개발이라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세종1호는 노바01의 성능을 그대로 분석해 만들어진 호환제품이다. 다만 노바01과 다른 독자적 설계에 1KB D램을 사용하는 등 성능을 크게 개선한 독자개발 제품이었다.

노바팀은 결국 1973년 3월까지 세종1호를 이용한 PABX 시스템인 ‘K1T-CCSS’를 개발하지만 청와대는 약속과 달리 계약을 파기시켰고, KIST는 기왕 개발한 세종1호를 상용화한다. GTE사가 ‘KIST 500’과 ‘세종1호’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1977년 2월 삼성그룹과 삼성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삼성GTE사는 이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산 컴퓨터 및 TDX-1 개발의 밑거름이 된 교환기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

오리콤570 조립 성공을 소개한 1977년 기사


세종1호에 이어 동양전산기술이 1976년부터 ‘오리콤540’을, 1977년부터 ‘오리콤570’을 조립해 출시한다. 이어서 금성전기가 1976년 11월부터 1977년 7월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수체제어연구실과 공동으로 국내최초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최초의 국산 잉크제트프린터 ‘GS JET1200’ 개발에 성공한 다음 1977년 7월 6일, 서울역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 GSCOM80A 마이크로컴퓨터와 GS JET1200 잉크제트프린터, GSM 2000도트매트릭스 프린터를 발표한다. 1978년 3월부터는 한글 모아쓰기가 가능한 CRT단말기를 삼성전자가 개발한다.


[잠깐] 돈 안 준 청와대와 세종1호의 존재 공개

어렵게 ‘세종1호’를 약속 기일 안에 완성시켰으나 청와대는 신뢰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KIST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문제는 약속한 개발비용 6000만 원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 제품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허가만을 준다. 결국 KIST측은 미국 GTE사와 상용화 프로젝트를 계약 맺고 1975년 초에 ‘KIST 500’을 발표한다. ‘세종1호’의 존재가 일반에 알려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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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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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9 08:52
최초의 인터넷 논문에서 국내 첫 웹 워크숍까지

국내 최초의 인터넷 논문

인터넷의 근간이 되는 프로토콜인 TCP/IP를 국내 학회에 최초로 소개한 것은 1984년 카이스트 전길남 교수 연구팀의 연구논문이다. 전길남 교수 연구팀은 네트워크의 확장을 위해 미국 ‘BBN’사의 TCP/IP 네트워크 장비를 구매하여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3억 원이라는 고가의 장비를 학교에서 구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연구팀은 카이스트의 컴퓨터에 TCP/IP를 설치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로 하고 그 결과물을 1984년 봄, 정보과학회에 ‘4.2 BSD Kernel과 UNET TCP/IP와의 인터페이스’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타자기와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작성된 논문은 TCP/IP의 구조를 소개하고, TCP/IP와 BSD 운영체제 커널(Kernel)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연결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이야기였다. 이 논문을 시작으로 국내 학계에서도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KRnet 93’ 행사로 웹이 처음으로 소개되다.

웹에 대한 정보는 그로부터 10년 정도 뒤에 제공되었다.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1993년에 네트워크 컨퍼런스인 ‘KRnet 93(코리아넷 93)’이 개최된다. 이때  '제1회 한국학술전산망워크숍'에서 포항공대 이재용 교수의 강의를 통해 웹(Web)이 소개된다. 이재용 교수의 강의는 국내에 공식적으로 처음 웹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다. 웹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각 기관과 기업 종사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처럼 1993년부터 웹에 대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웹에 대한 정보 욕구가 컸지만 관련 서적이 없어서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지식을 모아 웹 관련 책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올라왔고, 22명의 자원 필자가 모였다. 이들이 각자 집필한 글을 모아서 1995년 2월에 182쪽 분량의 책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국내에 웹 사용법을 처음 소개한 책인《가자 웹의 세계로》이다.

1995년에 나온 ‘가자 웹의 세계로’ 개정판 내용


당시 나와 내 선배도 통신과 인터넷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몇 가지 사정으로 출간이 늦어진 점은 지금도 아쉽다. 1994년, 코넷의 소백 계정 서비스를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겪었던 문제는 인터넷에 대한 대중 설명서의 부재였다. 1994년까지는 인터넷 사용법을 다룬 책이 없었고, 1995년 초부터 번역서가 등장했다. 당시 내가 인터넷에 관한 정보를 얻은 곳은 매달 배달되던 미국의 컴퓨터잡지와 컴퓨서브CD였다. 특히 컴퓨서브CD를 통해 알게 된 웹과 NCSA 모자이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1994년에 집필했던 《김중태 통신이야기》에 웹과 모자이크에 대해 언급했고, 같은 사무실에 있던 선배는 인터넷과 웹 관련 책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는 1994년에 탈고가 되었지만 몇 가지 사유로 반년이 지난 1995년에야 내 책과 선배가 쓴 《렛츠고 인터넷》이 출간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 책들을 꺼내보면서 모자이크의 추억이 담긴 웹과 명령어 방식으로 어렵게 쓰던 이메일, 그 외 고퍼, 베로니카, 핑, 후이즈 등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도구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곤 한다.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배포된 《가자 웹의 세계로》는 인터넷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개 세미나가 제안되었고, 그 결과 1995년 3월에 충남대학교에서 600명이 모여 국내 최초의 웹 워크숍을 열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웹과 함께 한 것 같지만 IT전문가들도 겨우 1995년에야 웹의 기술을 접했을 정도로 한국 웹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그 짧은 10년 동안 웹은 우리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첫 워크숍은 100여 명 정도 모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6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해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인터넷 접속 방법, HTML 소개, 웹브라우저 사용 방법, 웹서버 설치 방법 등 지금 보면 아주 기초적인 주제들이지만 당시 첫 워크숍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선한 내용이었다. 열기도 매우 뜨거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웹이 매우 인기 있는 컴퓨팅 기술이 될 거라는 공통된 인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 웹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보급된 것은 이 워크숍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96년에는 인터넷 상에서 개최된 국내 첫 본격 학술행사인 ‘정보엑스포96(Internet Expo 96)’이 열린다. 한국은 한국전산원 주관으로 참여했는데 인터넷 웹사이트가 전시관의 기능을 하도록 구성되어 웹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정보엑스포96’에서 ‘인터넷 월드 코리아(Internet world Korea)’, ‘코리아넷(KRnet'96)’, ‘월드와이드웹 워크숍(WWW Workshop'96)’ 등의 컨퍼런스를 함께 개최하며 인터넷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잠깐] 인터넷의 하루를 기록한다. ‘e하루616’

2004년 6월에 서울의 하루 동안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진행되었던 ‘한도시 이야기’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음 커뮤니케이션즈 임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24명이 그날의 인터넷을 기록한 ‘@2004’가 진행되었고, 결과물은 모두 정보트러스트센터에 기증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5년 6월16일에 ‘e하루616’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e하루616’은 1년 중 단 하루인 6월 16일에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를 보관하는 행사다. 자신이 보관하고 싶은 사이트를 기록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함으로써 인터넷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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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8 09:16
벅스뮤직과 소리바다로 본 저작권 문제

스트리밍 방식의 벅스뮤직이 서비스를 시작하다

1999년 9월 ‘벅스뮤직’이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전까지 음악 서비스가 내려 받기 방식인 반면 벅스뮤직은 스트리밍 방식을 도입했다. 벅스뮤직과 같은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은 초고속통신망의 보급 덕분이다. 전화모뎀을 이용한 통신망으로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할 수 없지만 초고속인터넷망에서는 가능했다.

원하는 노래를 검색한 다음에 이를 다시 내려 받아 저장하고 듣고 싶을 때 다시 컴퓨터를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에 비해 검색어를 입력하고 바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벅스뮤직은 훨씬 편리했다. 벅스뮤직은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가서 들을 수 있는 서비스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2001년 11월부터 저작권 문제로 인한 소송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결국 무료서비스였던 벅스뮤직은 2003년부터 유료화를 진행한다. 벅스뮤직은 음원과 관련된 저작권 분쟁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벅스뮤직 관련 분쟁은 음원 관련법과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작권 문제 이후 유료 서비스로 전환한 벅스뮤직



소리바다 폐쇄 결정과 온라인의 음악 파일 삭제

벅스뮤직과 같은 논란을 일으킨 서비스로 ‘소리바다’가 있다. 2000년 5월 서비스를 시작한 소리바다는 공짜로 음악파일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되면서 네티즌에게 인기를 끌었으나 늘 저작권 문제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소리바다를 통해 P2P라는 서비스의 개념을 알았지만 정작 소리바다는 저작권 문제로 고소를 당한 후에 서비스가 정지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소리바다는 2002년 7월과 2003년 2월에 서버운영 중지 가처분 판결을 받은 바 있으며, 2003년 7월 9일에는 법원이 소리바다에 대하여 서비스를 중지하라는 취지의 가처분결정을 내린다. 이때마다 소리바다는 소리바다2, 소리바다3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서비스로 바꾸면서 법원 판결을 피해갔다. 물론 소리바다에서는 유료화 모델인 ‘MP3#’을 도입하는 등 저작권자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바다에 대한 소송을 주도했던 한국음원제작자협회(음제협)는 ‘합법과 불법의 공존이란 있을 수 없다’라면서 소리바다를 강력하게 압박했다.

이후 2005년에 ‘전송권’을 규정한 법안이 통과되면서 네티즌들은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려놓은 음악 파일을 모두 삭제해야 했다. 그러나 저작권자는 소리바다를 폐쇄하고 블로그의 음악을 삭제하는 것에만 신경 썼을 뿐 정작 블로그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는 마련하지 않았다. 시장은 만들지 않고 그나마 성장 가능한 자생적 시장마저 불법이라는 굴레로 없애버린 것이다.

전송권이 포함된 새로운 법이 통과된 이후 네티즌에 대한 대규모 고발이 연달아 이루어졌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150명의 이용자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다고 밝힌 2005년 9월 8일에서 며칠이 지난 9월 12일에는 음악산업협회가 소리바다, 파일구리 등 P2P를 통해 파일을 공유한 네티즌 1985명을 사이버수사대에 고발한 일이 일어났다. 네티즌이 이렇게 대규모로 고발된 일은 이전에 없었다. 정작 대규모 고발로 인한 정품시장 확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품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거들이 정식으로 음원을 구입해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장은 만들지 않고 고발만 했기에 저작권자의 대규모 고발 고소는 더욱 큰 반발과 더욱 은밀한 불법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에 그쳤다.

불법 논란으로 세월을 보내느라 큰 시장 놓쳐

스트리밍이나 P2P라는 기술은 이전의 저작권 개념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신기술이었다. 한국은 초고속인터넷망의 혜택을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두 기술을 잘 활용했다면 세계적인 서비스를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졌으나 기존 저작권자의 밥그릇 싸움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저작권자도 인터넷 서비스 업체도 모두 망하는 공멸의 길을 걷고 만다. 결국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음반시장은 쇠락했으나 대안을 마련하지 못 하고 10년을 보낸 것이다. 한국에서 불법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미국에서는 애플의 아이튠즈 스토어가 등장해 10억 곡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갔다. 결국 내려받기 서비스는 휴대폰 벨소리 시장으로 좁아졌고 스트리밍 서비스는 배경음악 등으로 한정되면서 음원시장의 수익은 저작권자가 아닌 이통사가 가져가는 구도가 되었고, 음원시장의 주도권도 유통업체인 이통사로 넘어가는 변화를 겪게 된다.

법무법인의 저작권 사냥으로 자살하는 청소년까지 생겨

저작권 문제는 저작권사냥꾼, 저작권파파라치라고 하는 법무법인의 저작권 무차별 고소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 음원을 올린 네티즌을 무차별 고소한 다음에 합의금을 뜯어내는 변호사를 말한다. 저작권 위반을 핑계로 경찰에 고소하면 경찰이 네티즌에게 고소 사실을 알려주고 합의보라고 말하게 되고 법무법인 직원은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저작권 고소 전문 변호사들은 값싼 아르바이트생을 이용해 미니홈피, 카페, 블로그, P2P, 웹하드, 공유 사이트를 뒤져서 한 건당 50~100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들이 진짜 문제가 되는 헤비업로더는 건드리지 못하고 저작권 개념이 없는 어린 학생을 협박한다는 점이다.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한 네티즌에는 중고생이 많은데, 아이들은 형사처벌한다는 협박과 합의금 요구에 고민하다가 자살하기도 한다. 실제로 2007년 11월에도 소설을 내려 받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고등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학생 C군은 인터넷 소설을 올렸다가 고소당한 뒤에 합의금 60만원을 내지 못해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되었다.

그런데도 돈에 혈안이 된 변호사로 인해 고소 건수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광주시 교육청이 파악한 피고소 학생만 17명으로 2007년의 연간 2건에 비해 8.5배에 달하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고, 광주지역 경찰서에 최근 1년간 접수된 저작권 관련 고소의 47%인 633건이 10대를 고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는 2007년에 2만 5000건 정도가 발생했고 2008년에는 6만 건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검찰청 자료에 의하면 2008년 6월까지 접수된 것만 해도 3만 2446건이고 이중 불기소 처분된 것이 2만 9902 건이라고 한다. 불기소 처분의 상당수가 합의금을 낸 경우임을 감안하면 일 년에 6~1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저작권파파라치에 시달린다고 볼 수 있다.

고소 건수가 증가하면서 경찰서도 쓸 데 없는 서류심사에 인력을 많이 뺏기고 있다. 한 번에 100명을 고발하는 고소장이 들어오면 경찰로서도 일단 신원을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한 다음에 모두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범 소탕에 쓸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다. 경찰서마다 하루 평균 수십 건의 고소장이 들어온다.

저작권 단속의 합리적인 정책과 공유정신이 필요

저작권 문제는 기업에도 큰 고민거리다.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SPC)가 불법복제 단속을 할 때마다 작은 기업들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을 대피시키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기업에서 정품만 사서 쓴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깐 프로그램 때문에 천문학적인 벌금을 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업들이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무료라고 해서 집에서 쓰던 프로그램을 회사에 깔았더니 기업은 사서 써야 한다면서 저작권위반으로 고발되는 일도 많다.

저작권파파라치 변호사들이 정작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를 줄이는 방향보다는 돈을 뜯어내는데 혈안이 된 것처럼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저작권 단속도 불법복제를 줄이는 방향보다는 건수를 올리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문제다. 학생들이 저작권법을 잘 몰라서 고소된 가벼운 사안인 경우에는 1, 2회 경고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법복제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쳐줄 수 있다. 또한 기업도 저작권 위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면 경과를 들어보고 경고조치와 정품으로 교체를 유도해 감당하기 힘든 벌금을 물리지 않는 정책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공개프로그램이나 오픈소스와 같은 프로젝트에 의해 무료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Creative Commons)와 같은 라이선스를 통해 콘텐츠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도 저작권 문제 해결과 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해외 네티즌은 유명한 사진 공유 사이트인 플릭커를 통해 CC 라이선스 적용을 받는 사진을 찾아내 사용하기 때문에 사진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하는 일이 적다. 한국에서도 CCL을 적용한 사진공유 서비스가 많아진다면 무료로 사진을 쓰게 될 것이고, 저작권 고소를 당하는 일도 줄 것이다. 결국 저작권 문제는 콘텐츠 및 프로그램을 무료로 공유할 수 있는 공유문화의 확산과 정품을 제 가격 내고 쓰겠다는 바른 저작권 문화에 대한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시작한 유료 음원 서비스인 뮤직샵

국내에서 음원 관련 시장이 분쟁에 휘말리는 동안에도 성공적인 서비스가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싸이월드에서 2002년 7월부터 시작한 '뮤직샵' 서비스는 배경음악 서비스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유료 서비스가 되었다. 노래 한 곡당 도토리 3.5개(350원)를 내고 배경음악을 구입하면 자신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쓸 수 있는 뮤직샵은 미니홈피 열풍에 힘입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500원으로 가격이 인상되었으나 여전히 이용자가 늘면서 2005년 11월에는 1억 곡 판매라는 기록을 세운다. 배경음음악 서비스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유료화 모델이 되면서 다른 사이트에서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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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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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7 08:54
인터넷경매로 시작한 옥션, 오픈마켓을 이끌다

옥션이 문을 열면서 한국에서도 인터넷 경매 서비스 시작

1998년 4월에 ‘인터넷 경매’라는 사이트가 문을 열며 한국에도 인터넷 경매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1999년 10월에 지금의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옥션은 아주 짧은 문장에서 출발한다. 당시 옥션을 구상한 이재훈 씨는 책에 나온 한 구절에 생각이 꽂힌다. “온라인으로 은행 업무를 보는 것처럼 미래에는 경매도 인터넷으로 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보고 ‘그래 이거야’를 외친 그는 미련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와 창업을 결심한다. 그때 함께 창업한 사람이 나중에 ‘원어데이’라는 한개몰을 운영하는 이준희 씨다.

당시 주변사람은 모두 이재훈 씨를 말렸다. 눈으로 보고 얼마나 낡았는지를 확인하고 사는 중고물품을 보지도 않고 누가 인터넷으로 사겠냐는 반대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확신했던 이재훈 씨는 옥션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터넷 경매 사이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건을 올리는 판매자가 없어서 두 사람은 직접 판매자를 설득해서 물건을 얻어온 다음에 자신들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상품을 대신 등록해주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옥션은 성장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1년 1월에 이베이에 인수되면서 벤처대박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현재는 이베이에 인수된 옥션(www.auction.co.kr)


경매에서 오픈마켓으로 전환

옥션은 처음에 경매를 기본 사업으로 시작했으나 경매를 이용한 거래 규모가 크지 않았다. 중고물품 거래라는 것이 아무래도 신규상품 거래보다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모델을 점차 상점을 입점시키는 오픈마켓으로 바꿔나갔다. 옥션은 2002년부터 경매와 공동구매에서 온라인마켓플레이스로 사업모델을 변경하고 2002년 2/4분기부터 흑자로 전환한다. 그렇게 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인터넷에 물건을 올리고 사고 팔 수 있는 오픈마켓 시장이 열린다.

옥션이 장악한 경매 및 오픈마켓 시장은 한동안 도전자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터파크의 사내벤처인 G마켓이 도전장을 던지면서 상황은 반전한다. 1999년에는 인터파크의 사내벤처인 구스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G마켓은 옥션보다 뒤늦게 출발한 후발주자라는 단점을 안고도 2006년부터는 옥션의 매출을 넘어서는 역전을 일군다. 다양한 쿠폰 정책과 저렴한 가격 및 빠른 결제시스템을 무기로 오픈마켓 시장의 1위가 된 것이다. 그 외 CJ의 엠플, 다음의 온켓을 비롯하여 다양한 쇼핑몰과 오픈마켓이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G마켓도 옥션에 이어 이베이에 인수되면서 현재 한국의 오픈마켓 시장은 이베이의 독과점 체제에 SK텔레콤이 오픈마켓 시장에 뛰어들면서 만든 ‘11번가’가 대항하는 형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잠깐] 오픈마켓 시장의 확대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의 활성화는 인터넷 쇼핑몰 창업을 더욱 쉽게 만들어 주고 있다. 2004년 1월 온라인 쇼핑몰 개인 사업자는 1492개 사업체에서 2006년 6월 2695 업체로 1203개 늘어 2년 반 사이 약 80%가 증가했다. 유명 연예인의 창업도 늘었고, 수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쇼핑몰 운영자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2004년에는 고등학생이 인터넷 쇼핑몰을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를 차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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