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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04.20 13:53


2010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뉴스

그림이 깨져 보이면 콕 눌러 주세요.




파이낸셜뉴스 2010년 4월 15일자 기사
현대차 장애인의 날 앞두고 장애우 특별 방문 점검 서비스

연합뉴스 2010년 4월 2일자 기사
1970~1980년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버스 안내양'이 22년 만에 보령시에 등장했다.
시는 노약자와 장애우 등 버스이용 승객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중앙일보 2010년 2월 8일자 기사
노인·장애우들에게는 입장료를 3000원으로 할인해 주고 무료 초청 행사도 자주 마련했다.


호칭은 그것이 쓰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뜻이 결정되고 또 변화합니다.

2010년 장애인의 날을 맞아 관련 기사들을 검색해 보니 언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간지 지면에서조차 장애인을 지칭하는 명칭은 아직까지도 확립되지 못한 채 '장애인'과 '장애우'가 혼용되고 있네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 아직 정리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장애인과 마주 하다

아버지께서 수녀님과 함께 어떤 청년의 휠체어를 밀어드린 후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께서 그러시더라. '저 청년들이 표현이 서투를 뿐,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때는 장애인들을 잘 보살피라는 말씀 정도로 이해했는데...
내 앞을 걸어가는 어떤 아줌마의 목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더라고.

그 분은 휠체어를 탄 청년에게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이,
적당히 혀 짧은 콧소리를 섞어가며 말씀하셨거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친구 또래의 성인들에게도 이렇게 대했었나?'



'장애인' 호칭의 역사

《차별에 저항하라》에 따르면 시대별로 장애인을 지칭하는 명칭은 다음과 같이 바뀝니다.

(차별에 저항하라, 김도현 저, 박종철 출판사)

1950년대부터 장애인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불구자'라는 표현이 쓰입니다. 따라서 1954년 설립된 관련 단체의 이름도 당시에는 '한국 불구자 복지협회'(현 한국 장애인 재활 협회)였습니다.

이후 꾸준한 문제 제기 끝에 1981년 <심신 장애자 복지법>이 제정되면서 ‘불구자’라는 명칭은 ‘장애자’로 바뀝니다.


그러나 ‘장애자’라는 표현 역시 여전히 문제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합니다.

첫 번째, 장애자는 일본에서 쓰이는 '장해자'라는 표현을 우리말로 안이하게 수입한 것이며
두 번째, 장애자에 놈(者)가 들어가는 것은 비하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 ‘장애자’라는 표현은 현재까지 잔존한 ‘애자’라는 욕설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장애자라는 단어가 사회에서 잘못 받아들여지자 이를 대체할  '장애인'이라는 명칭이 1989년 장애인 복지법이 개정되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장애우'라는 명칭

한편 1987년 '장애우 권익 문제 연구소'에서는 '장애우'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합니다. 장애우라는 명칭을 제안한 까닭은 위에 서술한 장애자 명칭 비판과 변화를 위한 노력과 대동소이합니다.

이후 '장애우'라는 표현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꾼다는 목적에서 널리 유포되어 대학교 동아리를 거쳐 현재에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장애우'라는 호칭은 널리 사랑받는 만큼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장애인들의 거부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로 장애우의 '우(友)', '친구'라는 호칭에 전제된 의미 때문입니다.

‘친구’란 가까이 두고 사귄 동등한 위치의 타인을 가리키는 말로, 호명하는 이와 지시되는 이와의 '거리'와 '관계'가 전제된 적극적인 가치판단이 개입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라는 표현은 장애인  '스스로'를 지칭할 수 없고 장애인인 '손윗사람', 또는 공적인 표현으로 지칭하는 데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장애인들에게서 제기되었습니다.

이처럼 장애인을 가리키는 호칭을 놓고 논란이 일자 2008년 보건복지부는 장애인을 가리키는 새 이름을 공모해 '가능인', '가온인', '늘품인', '아울인', '해솔인' 등 5편을 우수상으로 뽑았지만, 억지로 맞춘 듯한 낯선 표현에 뜻이 금방 들어오지 않았고 장애인 단체의 반발도 있어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장애우’의 태생은 잘못된 것인가

많은 분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장애우 권익 문제 연구소'가 1987년 제안한 ‘장애우’라는 호칭은 1989년에 나온 '장애인'보다 2년 먼저 등장한 표현입니다. 즉 '장애우'라는 표현은 '장애인'이라는 명칭이 없던 시대에 '장애자'라는 표현이 품은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고민의 출발은, 장애 가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 지위가 무지와 잘못된 편견으로 ‘동정과 일방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비장애우가 아니라 바로 장애를 갖고 있는 당사자였던 것입니다.                    
                                                                2003년 2월 <함께걸음> 여준민 기자님의 글


'장애우'에서 '友'라는 표현은 '친구'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닌 <함께걸음>이라는 단체의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한다는 설립이념이 담긴 문화운동의 상징으로 해석해야겠지요. 예를 들어 일부 집단에서 쓰이는 동무, 동지 등의 표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여준민 기자님도  ‘비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장애우'라는 표현이 장애인을 비하한다는 문제 제기 중 일부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함께걸음>에서 말하는 장애우는 '오래 두고 사귄 벗'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장애우'라는 표현은 특정 단체의 신념에 대한 상징으로 존중받아야겠지요.



그럼에도 '장애우'를 지양해야 할 이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함께걸음>의 설립이념은 평등에서 시작되었고 그들의 '우'라는 표현이 사전적 정의를 따름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들의 문제 제기 역시 당시 매우 유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내포된 고유명사가 2010년 현재 장애인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서 널리 쓰이는 현상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애우'라는 표현이 등장했던 시대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사회적 배제를 당해온 장애인들의 삶이 제고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변화를 요구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987년이 아니라 2010년입니다.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인식, 차별에서는 갈 길이 멀지만 (19세기의 페미니즘과 2010년 페미니즘이 고민하는 문제가 각각 다르고 '여성'의 의미 역시 많이 변화하였듯이) 2010년 현재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고민이 필요합니다.
   
'장애우'는 1980년대에도 여전히 왜곡된 장애인관을 수정하지 않는 비장애인들의 각성을 요구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장애우'라는 표현의 지시 대상은 장애인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이며 주체는 장애인이 아니라 그들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동정과 시혜를 베푸는 비장애인의 '노력'입니다.

따라서 '장애우'는 비장애인의 시각으로 장애인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을 전제하기에 장애인과의 연대의 가치를 자선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며 타자화시킨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지하는 '각성의 시기'는 지났기에 유효 기간이 지난 시대적 용어는 대체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한 '장애우'는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사회적 단어이므로 언중에게 유포되어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서는 부적합합니다. 운동적인 용어인 '장애우'는 어느 한 계층에 대한 지시적, 사회적 용어로 언중 사이에서 기능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함께걸음> 스스로도 '장애우'를 법적, 사회적 공식용어로 일반화시키고자 한 것이 아님을 밝혔으므로, 어떤 장애인 개인이 정치적인 신념에서 스스로를  '장애우라고 불러달라' 고 요구한 경우가 아니라면, 장애인을 가리킬 때에는 특정 이념이 제거된 가치중립적인 호칭인 '장애인'이라고 지칭해야 할 것입니다.



장애인은 장애'인'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장애우'라는 말이 단체의 지향점을 벗어나 언중에게 널리 유포된 연유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게 일단 뭔가 잘해줘야 한다는 마음에서, 자신들의 시각으로 그들을 배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PC함(정치적 공정성)'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슬라보예 지젝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 PC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PC의 유형은 사람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추는 데 이용되는 책략이다. (중략)PC적인 태도는 차별로 인한 상처를 받은 이들에게 보상을 해준답시고 그들 위에 생색을 내면서 올라서고 있음을 은폐한다. (중략) 그러한 것으로 PC적 태도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의 자기기만의 한 사례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슬라보예 지젝 저, 도서출판 비)


사람은 누구나 ‘평범함’이라는 상식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기준에서 모자란 부분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장애인은 비장애인들의 기준에서 일상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비장애인들이 그렇듯이 순수하지 않을 수도, PC하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옆집 총각이 그렇듯이 '동지'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반짝일 뿐만 아니라 흩어지고 깨지고 구르기도 합니다.

노빈손 씨는 (아마도)날백수에 머리숱도 없고 그야말로 부족함 투성이죠. 아무리 그래도 새똥을 보고 군침을 흘릴 줄은... ㅠㅠ 빈손 씨 그러면 안 된다능.




또한 그들에게 헬렌 켈러나 스티븐 호킹, 오토다케처럼 역경을 극복하는 의지와 무엇인가를 해내는 업적, 현실을 긍정하는 낙천성은 결코, 당위가 아닙니다.
 
장애인들은 10대, 게이와 함께 환상 속에 존재하는 현대판 엘프들이 아니며, 비장애인들의 배경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만약 어떤 개인이 가진 한계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생활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기대와 판단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동지'가 아닌 '사람'이니까요.

저 역시 누군가 저를 존중한다면서 편집우라고 부른다면 매우 분노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는 결국 소수자이고 또한 예정된 장애인입니다.


 

김원영, 스물 아홉의 청년인 그는 이 책에서 유쾌한 척, 고상한 척, 성숙한 척 하는 장애인 역할이 싫다고 밝힙니다. 당연하지요, 사람이잖아요. 그는 한때 지하철에서 묵직한 책을 꺼내 들곤 했습니다. 남성으로서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은 똑같은데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성적인 존재’인 척을 하거나 그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책은 어느 청년의 하소연이 아니라 오승환 직구 같은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대가 있었기에 자신의 오늘이 가능하다고 긍정합니다.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김원영 저, 푸른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