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14 09:36
기숙사에서 탄생한 구글

인터넷 웹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던 래리 페이지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인터넷에 존재하는 모든 웹을 다운로드해서 각 웹페이지 간의 연결 구조, 즉 링크를 분석해보기로 한 것이다. 래리 페이지가 작업에 들어가자 세르게이 브린도 기꺼이 동참했다.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 웹상에서 링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링크가 많이 된 웹 페이지는 그만큼 가치가 있음을 뜻하였다. 하나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른 사이트의 주소를 링크하는 것은 일종의 투표와도 같았다. 학자 집안에서 자란 데다 박사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으로서 논문을 중요하게 여기던 래리 페이지에게 링크는 논문으로 치면 인용과 비슷했다. 훌륭한 논문일수록 다른 논문에서 참고문헌으로 인용될 확률이 높다.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상에서 링크된 횟수를 가지고 각 웹페이지의 순위을 정하는 작업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웹페이지의 순위를 매길 때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더했다. 만약 논문이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언급되면 그만큼 더욱 가치 있는 논문일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단순히 링크의 횟수뿐만 아니라 링크를 건 웹사이트의 명성에 가중치를 더하였다. 이를테면 「뉴욕타임스」처럼 권위 있는 언론사의 사이트에서 링크를 한 웹페이지라면 일반 블로그에서 인용한 링크보다는 더 높은 순위에 올라갈 수 있는 공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랭킹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래리 페이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렵고 무모한 일이었지만 세르게이 브린의 천재적 수학 실력 덕분에 어려운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래리 페이지는 웹페이지의 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을 검색에 접목해보고자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검색엔진은 검색어를 입력하면 그와 관련한 웹페이지를 순위에 따라 보여주었기 때문에 검색어와는 관련성도 떨어지고 중요하지 않은 웹페이지만 잔뜩 늘어놓는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훨씬 뛰어난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자신들이 만든 검색엔진을 백럽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구글로 바꾸었다. 구글은 원래 해안가의 모래 숫자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의 숫자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수를 뜻하는 구골Googol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연구실 동료였던 숀 앤더슨Sean Anderson이 회사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중스펠링을  ‘Google’로 잘못 적으면서 구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flickr - manfrys


구글 검색엔진이 서비스를 시작한 곳은 스탠퍼드 대학교의 서버였다(그래서 구글의 처음 인터넷 주소도 google.stanford.edu였다). 구글은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탁월했기 때문에 스탠퍼드 대학교 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는 사용자들의 검색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컴퓨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도 교수의 도움으로 학교 자금에서 1만 달러를 지원받았지만 구글을 제대로 서비스하기에는 컴퓨터가 부족했다. 결국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학교 곳곳을 돌며 컴퓨터 부품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잡동사니 부품들을 모아서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이때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하우를 쌓게 된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을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대형 서버 컴퓨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저가의 개인용 컴퓨터를 병렬적으로 연결해서 서버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비록 돈이부족해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방법이었지만, 최소의 비용으로 컴퓨터를 만들고 이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오늘날 구글이 성공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주변의 컴퓨터 부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컴퓨터를 구축해도 항상 장비가 부족했던 둘은 스탠퍼드 대학교에 새로 컴퓨터가 배달될 때 이를 몰래 가져다 쓰는 대담한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련된 컴퓨터 장비들은 래리 페이지의 기숙사 방에 설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이 컴퓨터로 가득 찼다. 그래서 검색엔진을 다듬는 실제 작업은 세르게이 브린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인터넷 웹페이지를 방문해서 데이터를 모아오는 작업은 네트워크에도 부담이 되는 문제였다. 이들이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긁어 올 때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네트워크는 종종 과부하에 걸렸고 학교 전체 인터넷망이 다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벤처기업의 요람인 스탠퍼드 대학교답게 이를 관대하게 넘어가주었다.

구글 서비스가 나날이 인기를 더하자 래리 페이지는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박사 과정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포털 업체에 구글을 백만 달러에 팔 생각이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당시 검색 점유율 50%가 넘었던 알타비스타를 시작으로 야후, 익사이트, 인포시크 등 당시 내로라하는 각종 포털 업체들을 찾아가서 구글을 시연해 보였다. 하지만 당장 꺼지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계속해서 기업들에게 거절을 당하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좌절감을 느꼈다. 너무 화가 났지만 포기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둘은 결국 학교를 떠나서 직접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구글의 창업 과정을 보면 시대를 앞선 선구자들의 비애가 느껴진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검색엔진이 인터넷 시대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포털 업체들은 검색을 수많은 인터넷 서비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구색을 맞추는 차원에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할 뿐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구글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고정관념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인정 받기가 힘들다. 70년대 중반 스티브 잡스가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2 컴퓨터로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미치광이 취급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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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정남 (e비즈북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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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13 10:00
레드오션의 최강자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 애플 같은 거인들을 비롯해 많은 기업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우선 엑셀과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에서는 로터스와 경쟁했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언어 시장에서는 볼랜드Borland와, 워드 프로그램에서는 워드퍼펙트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95를 출시하면서 이 모든 기업들을 하루아침에 넉다운시켜 버렸다. 이처럼 윈도우95는 경쟁 기업을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그 개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윈도우95를 탄생시키기까지의 여정에야말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저력이 숨겨져 있다.   

흔히 마이크로소프트를 레드오션의 최강자라고 한다. 이미 절대 강자가 존재하는 시장에 진출해서 기존의 강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왕좌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들마저 완전히 제거하고 시장 자체를 혼자서 독식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상대를 압도하는 방식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예술의 경지를 보여준다.   

윈도우만 해도 1.0 버전은 정말 형편없었다. 단순히 형편없었던 것뿐 아니라 제작도 순탄하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출시를 예고한 건 1983년 11월이었지만, 정작 발매는 2년이나 지난 1985년 11월에 이루어졌다. 당시만 해도 2년이라는 기간은 어마어마한 시간이었고, 프로그램 개발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내놓은 제품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포기하지 않았다. 윈도우2.0이 나왔을 때는 윈도우1.0을 무시하던 애플이 이제는 법적인 문제를 생각할 정도로 수준이 향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도우2.0 역시 시장에서 아무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만약 보통 기업이라면 거기서 포기했을 것이다.   

flickr - Robert Scoble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에는 실패에 관대한 문화가 있다. 오히려 일을 망치면 승진시켜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1984년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에 심각한 오류가 있어서 제품을 회수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제품 담당자를 해고하기는커녕 이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렇게 마이크로소프트는 실수와 실패를 반복해도 오히려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힘이 있다. 보통 마이크로소프트가 내놓는 첫 번째 제품은 형편없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버전을 내놓는다. 두 번째 버전은 첫 번째 제품보다는 좋지만 여전히 형편없다. 하지만 그들은 첫 번째 버전보다 발전한 것에 만족하는 듯하다. 그리고 세 번째 버전에서야 겨우 상대와 비교할 만한 제품을 내놓고 시장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네 번째 버전에서는 상대를 압도하며 시장을 장악하는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윈도우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버전은 형편없었지만, 1990년 윈도우3.0이 나오면서 비로소 성과를 얻기 시작했다. 윈도우3.0은 1년 동안 4백만 개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애플의 매킨토시가 출시된 후 6년간 팔린 것보다도 많은 숫자다. 윈도우3.0이 이토록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MS 오피스의 힘이 컸다. 윈도우3.0을 구입한 사람들 대부분이 MS 오피스를 사용하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MS 오피스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매킨토시 환경에서 실력을 쌓아온 결과이기도 했다. 로터스, 볼랜드, 워드퍼펙트는 IBM-PC를 주력으로 삼았기에 MS-DOS 환경에만 익숙했다. MS-DOS는 텍스트 기반의 운영체제였지만, 윈도우3.0은 그래픽 기반이었기 때문에 개발 방법이 완전히 달랐다. 따라서 라이벌 업체였던 로터스, 볼랜드, 워드퍼펙트가 윈도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추락하는 동안 마이크로소프트는 매킨토시에서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버렸다. 이렇게 윈도우3.0이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으면서 쟁쟁했던 경쟁사들을 압도한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이제 남은 상대는 IBM과 애플, 두 거인뿐이었다. 그러나 윈도우3.0의 성공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는 더 이상 IBM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IBM을 위해서 OS/2를 억지로 만들 생각이 없어진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 전격적으로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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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정남 (e비즈북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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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10 13:41
승리의 화신 빌 게이츠

오늘날 전 세계 IT 업계는 천하 삼분의 형세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세 기업이다. 적과 동지를 달리하며 끝없이 경쟁해온 이들은 오늘날 마침내  IT 삼국지 시대를 열었다.  IT 삼국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들의 과거를 먼저 살펴보겠다. 세 기업 간에 벌어진 가장 첫 번째 전쟁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사이의 소프트웨어 전쟁이었다. 이야기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 업계에서 성공을 먼저 맛본 쪽은 애플이었다. 애플은 애플2 컴퓨터의 폭발적인 성공으로 창업한 지 단 4년 만에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하루 아침에 2억 1,750만 달러를 보유한 억만장자가 되었고 미국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그런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동시에 몰락시킨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마이크로소프트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과 IBM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던 하청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1982년 억만장자 명단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의 이름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IBM과 애플처럼 하드웨어를 만드는 기업이 컴퓨터 업계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일찍이 소프트웨어의 힘을 간파했다. 빌 게이츠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분리함으로써 PC 업계를 지배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가 꺾어야 할 상대는 애플뿐이 아니었다. 애플보다 200배나 더 많은 매출을 기록하던 IBM이 있었다. 하지만 애플과 IBM의 하청 기업에 불과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두 기업을 단번에 몰락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승리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데는 역사상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천재적 사업가 빌 게이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빌 게이츠는 경쟁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승리하고야 마는 승부사적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보통 사람이 경쟁을 두렵고 괴롭게 여기는 데 반해 빌 게이츠는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즐겼다. 경쟁에 대한 자신감과 승리에 대한 열정은 빌 게이츠가 애플, IBM과 같은 거대 기업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갑부로 등극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flickr - World Economic Forum

지기 싫어하고 항상 누군가를 이기고자 하는 열망은 어린 시절부터 빌 게이츠의 전체 능력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누나와 퍼즐 게임을 하거나 썰매를 탈 때도 절대로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한번은 교회의 목사가 산상수훈山上垂訓 (신약「마태복음」 중 일부)을 다 암송하는 사람에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빌 게이츠는 단 두 시간 만에 산상수훈을 전부 외웠다고 한다. 이는 신앙심보다도 그의 타고난 승부욕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빌 게이츠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고 즐기는 놀이는 브리지 게임이다.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집착하는 그가 카드 게임에 빠져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심지어 빌 게이츠는 보통의 학생들이 싫어하는 시험조차도 좋아할 정도였다. 그는 학교에서 시행하는 읽기 시험에서 여러 번 일등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것이 지기 싫어하는 빌 게이츠의 성격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모든 것에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종종 부모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참다못한 그의 아버지가 컵에 있던 찬물을 빌 게이츠 얼굴에 끼얹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빌 게이츠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정신과 상담의는 빌 게이츠 부모에게 그를 통제하려 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그리고 부모님과 전쟁 중이라고 선언한 빌 게이츠에게는 부모님들이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당신이 그들의 아들이기 때문에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부모님을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빌 게이츠는 생각을 바꾸고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남에게 뒤처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이른바 보이스카우트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보이스카우트에서는 매년 여름 80킬로미터를 행군하는 캠프를 개최한다. 빌 게이츠 역시 이 행사에 참여했는데, 새로 산 신발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발 뒤꿈치가 까지고 말았다. 행군을 할수록 발꿈치의 상처는 더욱 심각해져서 발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사흘째 진행되던 날 신발 전체에 핏물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빌 게이츠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보이스카우트 관계자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와서 강제로 빌 게이츠를 데려가야만 했다.   

빌 게이츠의 승부사적 기질은 부모의 노력으로 더욱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흔히 자녀가 경쟁에 강한 정신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스포츠를 권장하는데 빌 게이츠 부모 역시 그랬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매년 여름마다 별장이 있는 후드 커낼에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치리오 올림픽을 성대하게 열었다. 치리오 올림픽은 깃발 뺏기나 이인삼각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비롯해 수영, 테니스, 수상스키 등 격렬한 움직임이 필요한 스포츠 종목을 겨루는 가족대항전이었다. 이는 친목을 다지고, 가족간에 유대감을 높이는 데 의미가 있는 행사였지만 빌 게이츠에게는 무엇보다도 승리가 중요했다. 빌 게이츠는 이 행사를 통해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렀다. 그리고 이렇게 키워진 그의 승부사적 자질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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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정남 (e비즈북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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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10 08:57
두루넷과 하나로가 초고속통신망 서비스를 시작하다

믿기 어려웠던 초고속통신망 광고

56Kbps 모뎀을 겨우 지원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TV에 초고속통신망 광고가 등장한다. 탤런트 권해효 씨가 권투를 하다 쓰러지는 두루넷 광고와 금난새 씨가 지휘를 하자 아름다운 선율이 각 가정 위를 흐르는 하나로통신 광고였다. 처음 이 광고가 등장했을 때 나는 10Mbps가 넘는 속도로 인터넷을 쓴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몇 년에 한 번씩의 간격으로 두 배씩 올라가던 속도가 갑자기 수백 배로 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런 속도가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비쌀까 싶었다. 그런데 10Mbps가 불과 ·4만 원 선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당시 56Kbps 전용선이 50만 원 전후였고, E1 T1급 회선이 수백만 원을 넘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4만 원 정도로 메가급 이상의 속도가 나는 회선을 쓴다는 것은 쉽게 납득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1999년 5월, 관악구에 유일하게 하나로 ADSL이 들어온다는 센추리 오피스텔로 이사를 해서 직접 사용해봤다. 그리고야 깨달았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그림 하나 화면에 뿌리는 데 몇 분씩 걸리는 답답한 인터넷의 시대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두루넷(www.thrunet.com)의 1998년 초고속통신망 광고


ADSL 이전에 KT에서 밀었던 것은 ISDN
케이블과 ADSL 이전에 정부 및 한국통신이 밀었던 통신망은 ISDN이었다. 1993년 12월 29일에 한국통신(KT)은 ISDN(종합정보통신망)의 상용 서비스를 시범 개시했다. ISDN서비스는 전화선 하나에 8대의 통신기기 연결이 가능하고, 2회선을 이용해 2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속도는 기존 56Kbps 모뎀보다 두 배가 넘게 빠른 128Kbps를 지원했기 때문에 ‘꿈의 통신망’으로 부르며 언론에서 크게 보도했고, PC통신 사용자들의 기대도 컸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보급에는 난항을 겪었다. 몇 년 후 한국통신은 ISDN-II를 다시 내놓고 최지우, 김민종 등 유명 탤런트까지 동원해 TV광고와 지면 광고를 집행했으나 이때는 ADSL 등의 초고속인터넷망에 밀려 결국 실패한 방식으로 사라졌다.

유명 탤런트까지 동원해 광고했지만 보급에 실패한 ISDN


두루넷과 하나로가 초고속통신망 서비스를 시작하다.

ISDN의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 1998년 7월 1일, 케이블TV망을 이용한 초고속통신망 서비스인 두루넷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56Kbps 모뎀시대에서 갑자기 수십 수백 배 빠른 초고속인터넷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IT강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어서 1999년 4월부터는 하나로 통신에 의해 세계 최초의 ADSL서비스가 시작된다. 같은 해 6월에는 한국통신이 ADSL 시범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초고속인터넷 상용서비스 시대가 열렸다. 이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2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4인 가정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마다 1회선이 깔린 셈이다.

한국통신은 ISDN을 포기하고 1999년 12월부터는 ‘메가패스’란 상품명으로 ADSL 서비스를 시작하며 2000년 밀레니엄 시대에는 밀레니엄 마케팅을 한다는 3M 전략을 들고 나왔다. 2000년 안에 100만 가구 가입을 목표로 한 것이다. 한국통신은 예상보다 빠른 2000년 9월에 가입자 100만 명을 넘어서고 연말에는 185만 명을 달성한다. 이에 따라 2000년 말에는 국내 초고속통신망 가입자가 300여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20002년에는 데이콤, 온세통신, 드림라인까지 초고속통신망 사업에 뛰어들어 더욱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2002년 10월에는 국내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한다.

CJ드림의 드림엑스 서비스

한국인터넷진흥원의 ‘2008 한국인터넷백서’에 따르면 2007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1471만 명으로 전체 가구의 약 90%에 가까운 가입률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100명당 가입자 수는 29.9명으로 4인 가구 기준으로 대다수 가구에 이미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된 상태가 되었다.

또한 2002년 8월부터는 13Mbps급의 VDSL을, 2004년 12월부터는 50Mbps급의 VDSL을 시작했다. ADSL의 경우 전화국에서 5.5Km까지 서비스가 가능하지만, VDSL은 2.5Km까지만 가능하며 최대 속도는 300m 이내에 가입자가 있어야 한다는 제약사항이 있었지만 기존 전화선으로도 광가입자망통신(FTTH)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었다. 2007년 12월 기준으로 50Mbps 이상의 속도를 보이는 가입자가 701만여 명으로 47.7%를 차지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FTTH로 교체되고 있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회선으로 인터넷을 즐기는 나라가 되었다.


[잠깐] ISDN에서 ADSL로 넘어간 이유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속통신망 국가로 성장하면서 인터넷 인프라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ADSL의 보급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가 1998년에 ADSL을 초고속 인터넷 표준으로 채택한 것에는 당시 정통부 장관이던 배순훈 장관의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ADSL은 반경 5킬로미터를 넘어가면 통신 속도 및 안정성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단점 때문에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인터넷 회선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던 기술이다. 그러나 배순훈 장관은 한국의 경우 전화국 반경 5킬로미터 이내에 대부분의 가구가 있기 때문에 기존에 깔린 전화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ADSL을 통해 초고속망 도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10년 뒤의 광케이블(FTTH) 보급 전까지는 ADSL로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ISDN 대신 ADSL를 채택했다. 반면 독일과 일본은 IDSN을 선택함으로써 느린 회선으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IT사100파콤222에서미네르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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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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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9 09:17
디지털 컴퓨터 1호 ‘세종1호’

산업발전이 아니라 대통령의 도청을 막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

최초의 컴퓨터는 이만영 박사의 전자계산기 1호에서 3호지만 아날로그 제품이었고, 상업화나 양산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실제 상업적으로 사용된 컴퓨터 1호는 ‘세종1호’다.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서 만든 한국 최초의 국산 디지털컴퓨터다.

‘세종1호’ 개발 프로젝트는 청와대에 의해 ‘메모 콜(Memo Call)’이라는 암호로 시작됐다. 개발 이유는 산업발전이 아닌 정치 목적 때문이다. 1972년 4월에 청와대는 ‘청와대의 주요 기관 사이의 전화통화에 대해 외국 정보기관의 도청 가능성을 차단하면서도 언제라도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을 제어 가능한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를 1973년 3월까지 개발 가능한가.’를 KIST에 의뢰한다. 7.4남북공동상황을 전후로 한 중요한 정치적 상황에서 통신비밀이 보장되는 핫라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KIST측은 2개월여 동안의 연구조사 끝에 청와대가 요구한 교환기(PABX)가 미국과 소련 등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특수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당시 유행하던 ‘노바01’이나 ‘PDP11’ 등의 미니컴퓨터를 PABX 시스템제어용으로 사용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KIST측은 ‘노바팀’이라는 비밀 개발팀을 구성한 다음에 청와대 쪽과 ‘메모콜’ 개발 프로젝트를 1972년 6월부터 시작했다. 메모콜을 위해서는 교환기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해야 했다. 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했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요한 성능 좋은 컴퓨터도 필요했다. 개발에 필요한 컴퓨터로는 ‘PDP 8/E’가 적당했는데, 주문에서 인도까지 몇 달이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개발시한은 1973년 3월이었고 청와대는 전면에 나서 지원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DG가 생산한 ‘노바01’을 3대 주문해서 연구실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어셈블리어로 통신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교환기를 위해 만들어야 했던 국산1호 컴퓨터 ‘세종1호’

문제는 노바팀이 개발한 제어용 소프트웨어가 ‘노바01’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노바팀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구현하려면 시분할 처리가 필요한데, 노바01은 시분할 처리 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분할 방식을 리얼타임으로 제어하는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해졌고 ‘세종1호’ 개발이 시도되었다.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아니었지만 컴퓨터 개발이라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세종1호는 노바01의 성능을 그대로 분석해 만들어진 호환제품이다. 다만 노바01과 다른 독자적 설계에 1KB D램을 사용하는 등 성능을 크게 개선한 독자개발 제품이었다.

노바팀은 결국 1973년 3월까지 세종1호를 이용한 PABX 시스템인 ‘K1T-CCSS’를 개발하지만 청와대는 약속과 달리 계약을 파기시켰고, KIST는 기왕 개발한 세종1호를 상용화한다. GTE사가 ‘KIST 500’과 ‘세종1호’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1977년 2월 삼성그룹과 삼성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삼성GTE사는 이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산 컴퓨터 및 TDX-1 개발의 밑거름이 된 교환기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

오리콤570 조립 성공을 소개한 1977년 기사


세종1호에 이어 동양전산기술이 1976년부터 ‘오리콤540’을, 1977년부터 ‘오리콤570’을 조립해 출시한다. 이어서 금성전기가 1976년 11월부터 1977년 7월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수체제어연구실과 공동으로 국내최초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최초의 국산 잉크제트프린터 ‘GS JET1200’ 개발에 성공한 다음 1977년 7월 6일, 서울역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 GSCOM80A 마이크로컴퓨터와 GS JET1200 잉크제트프린터, GSM 2000도트매트릭스 프린터를 발표한다. 1978년 3월부터는 한글 모아쓰기가 가능한 CRT단말기를 삼성전자가 개발한다.


[잠깐] 돈 안 준 청와대와 세종1호의 존재 공개

어렵게 ‘세종1호’를 약속 기일 안에 완성시켰으나 청와대는 신뢰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KIST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문제는 약속한 개발비용 6000만 원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 제품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허가만을 준다. 결국 KIST측은 미국 GTE사와 상용화 프로젝트를 계약 맺고 1975년 초에 ‘KIST 500’을 발표한다. ‘세종1호’의 존재가 일반에 알려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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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9 08:52
최초의 인터넷 논문에서 국내 첫 웹 워크숍까지

국내 최초의 인터넷 논문

인터넷의 근간이 되는 프로토콜인 TCP/IP를 국내 학회에 최초로 소개한 것은 1984년 카이스트 전길남 교수 연구팀의 연구논문이다. 전길남 교수 연구팀은 네트워크의 확장을 위해 미국 ‘BBN’사의 TCP/IP 네트워크 장비를 구매하여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3억 원이라는 고가의 장비를 학교에서 구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연구팀은 카이스트의 컴퓨터에 TCP/IP를 설치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로 하고 그 결과물을 1984년 봄, 정보과학회에 ‘4.2 BSD Kernel과 UNET TCP/IP와의 인터페이스’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타자기와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작성된 논문은 TCP/IP의 구조를 소개하고, TCP/IP와 BSD 운영체제 커널(Kernel)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연결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이야기였다. 이 논문을 시작으로 국내 학계에서도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KRnet 93’ 행사로 웹이 처음으로 소개되다.

웹에 대한 정보는 그로부터 10년 정도 뒤에 제공되었다.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1993년에 네트워크 컨퍼런스인 ‘KRnet 93(코리아넷 93)’이 개최된다. 이때  '제1회 한국학술전산망워크숍'에서 포항공대 이재용 교수의 강의를 통해 웹(Web)이 소개된다. 이재용 교수의 강의는 국내에 공식적으로 처음 웹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다. 웹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각 기관과 기업 종사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처럼 1993년부터 웹에 대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웹에 대한 정보 욕구가 컸지만 관련 서적이 없어서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지식을 모아 웹 관련 책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올라왔고, 22명의 자원 필자가 모였다. 이들이 각자 집필한 글을 모아서 1995년 2월에 182쪽 분량의 책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국내에 웹 사용법을 처음 소개한 책인《가자 웹의 세계로》이다.

1995년에 나온 ‘가자 웹의 세계로’ 개정판 내용


당시 나와 내 선배도 통신과 인터넷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몇 가지 사정으로 출간이 늦어진 점은 지금도 아쉽다. 1994년, 코넷의 소백 계정 서비스를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겪었던 문제는 인터넷에 대한 대중 설명서의 부재였다. 1994년까지는 인터넷 사용법을 다룬 책이 없었고, 1995년 초부터 번역서가 등장했다. 당시 내가 인터넷에 관한 정보를 얻은 곳은 매달 배달되던 미국의 컴퓨터잡지와 컴퓨서브CD였다. 특히 컴퓨서브CD를 통해 알게 된 웹과 NCSA 모자이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1994년에 집필했던 《김중태 통신이야기》에 웹과 모자이크에 대해 언급했고, 같은 사무실에 있던 선배는 인터넷과 웹 관련 책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는 1994년에 탈고가 되었지만 몇 가지 사유로 반년이 지난 1995년에야 내 책과 선배가 쓴 《렛츠고 인터넷》이 출간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 책들을 꺼내보면서 모자이크의 추억이 담긴 웹과 명령어 방식으로 어렵게 쓰던 이메일, 그 외 고퍼, 베로니카, 핑, 후이즈 등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도구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곤 한다.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배포된 《가자 웹의 세계로》는 인터넷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개 세미나가 제안되었고, 그 결과 1995년 3월에 충남대학교에서 600명이 모여 국내 최초의 웹 워크숍을 열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웹과 함께 한 것 같지만 IT전문가들도 겨우 1995년에야 웹의 기술을 접했을 정도로 한국 웹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그 짧은 10년 동안 웹은 우리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첫 워크숍은 100여 명 정도 모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6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해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인터넷 접속 방법, HTML 소개, 웹브라우저 사용 방법, 웹서버 설치 방법 등 지금 보면 아주 기초적인 주제들이지만 당시 첫 워크숍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선한 내용이었다. 열기도 매우 뜨거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웹이 매우 인기 있는 컴퓨팅 기술이 될 거라는 공통된 인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 웹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보급된 것은 이 워크숍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96년에는 인터넷 상에서 개최된 국내 첫 본격 학술행사인 ‘정보엑스포96(Internet Expo 96)’이 열린다. 한국은 한국전산원 주관으로 참여했는데 인터넷 웹사이트가 전시관의 기능을 하도록 구성되어 웹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정보엑스포96’에서 ‘인터넷 월드 코리아(Internet world Korea)’, ‘코리아넷(KRnet'96)’, ‘월드와이드웹 워크숍(WWW Workshop'96)’ 등의 컨퍼런스를 함께 개최하며 인터넷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잠깐] 인터넷의 하루를 기록한다. ‘e하루616’

2004년 6월에 서울의 하루 동안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진행되었던 ‘한도시 이야기’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음 커뮤니케이션즈 임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24명이 그날의 인터넷을 기록한 ‘@2004’가 진행되었고, 결과물은 모두 정보트러스트센터에 기증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5년 6월16일에 ‘e하루616’ 캠페인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e하루616’은 1년 중 단 하루인 6월 16일에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를 보관하는 행사다. 자신이 보관하고 싶은 사이트를 기록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함으로써 인터넷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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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8 09:16
벅스뮤직과 소리바다로 본 저작권 문제

스트리밍 방식의 벅스뮤직이 서비스를 시작하다

1999년 9월 ‘벅스뮤직’이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전까지 음악 서비스가 내려 받기 방식인 반면 벅스뮤직은 스트리밍 방식을 도입했다. 벅스뮤직과 같은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은 초고속통신망의 보급 덕분이다. 전화모뎀을 이용한 통신망으로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할 수 없지만 초고속인터넷망에서는 가능했다.

원하는 노래를 검색한 다음에 이를 다시 내려 받아 저장하고 듣고 싶을 때 다시 컴퓨터를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에 비해 검색어를 입력하고 바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벅스뮤직은 훨씬 편리했다. 벅스뮤직은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가서 들을 수 있는 서비스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2001년 11월부터 저작권 문제로 인한 소송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결국 무료서비스였던 벅스뮤직은 2003년부터 유료화를 진행한다. 벅스뮤직은 음원과 관련된 저작권 분쟁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벅스뮤직 관련 분쟁은 음원 관련법과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작권 문제 이후 유료 서비스로 전환한 벅스뮤직



소리바다 폐쇄 결정과 온라인의 음악 파일 삭제

벅스뮤직과 같은 논란을 일으킨 서비스로 ‘소리바다’가 있다. 2000년 5월 서비스를 시작한 소리바다는 공짜로 음악파일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되면서 네티즌에게 인기를 끌었으나 늘 저작권 문제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소리바다를 통해 P2P라는 서비스의 개념을 알았지만 정작 소리바다는 저작권 문제로 고소를 당한 후에 서비스가 정지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소리바다는 2002년 7월과 2003년 2월에 서버운영 중지 가처분 판결을 받은 바 있으며, 2003년 7월 9일에는 법원이 소리바다에 대하여 서비스를 중지하라는 취지의 가처분결정을 내린다. 이때마다 소리바다는 소리바다2, 소리바다3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서비스로 바꾸면서 법원 판결을 피해갔다. 물론 소리바다에서는 유료화 모델인 ‘MP3#’을 도입하는 등 저작권자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바다에 대한 소송을 주도했던 한국음원제작자협회(음제협)는 ‘합법과 불법의 공존이란 있을 수 없다’라면서 소리바다를 강력하게 압박했다.

이후 2005년에 ‘전송권’을 규정한 법안이 통과되면서 네티즌들은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려놓은 음악 파일을 모두 삭제해야 했다. 그러나 저작권자는 소리바다를 폐쇄하고 블로그의 음악을 삭제하는 것에만 신경 썼을 뿐 정작 블로그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는 마련하지 않았다. 시장은 만들지 않고 그나마 성장 가능한 자생적 시장마저 불법이라는 굴레로 없애버린 것이다.

전송권이 포함된 새로운 법이 통과된 이후 네티즌에 대한 대규모 고발이 연달아 이루어졌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150명의 이용자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다고 밝힌 2005년 9월 8일에서 며칠이 지난 9월 12일에는 음악산업협회가 소리바다, 파일구리 등 P2P를 통해 파일을 공유한 네티즌 1985명을 사이버수사대에 고발한 일이 일어났다. 네티즌이 이렇게 대규모로 고발된 일은 이전에 없었다. 정작 대규모 고발로 인한 정품시장 확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품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거들이 정식으로 음원을 구입해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장은 만들지 않고 고발만 했기에 저작권자의 대규모 고발 고소는 더욱 큰 반발과 더욱 은밀한 불법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에 그쳤다.

불법 논란으로 세월을 보내느라 큰 시장 놓쳐

스트리밍이나 P2P라는 기술은 이전의 저작권 개념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신기술이었다. 한국은 초고속인터넷망의 혜택을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두 기술을 잘 활용했다면 세계적인 서비스를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졌으나 기존 저작권자의 밥그릇 싸움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저작권자도 인터넷 서비스 업체도 모두 망하는 공멸의 길을 걷고 만다. 결국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음반시장은 쇠락했으나 대안을 마련하지 못 하고 10년을 보낸 것이다. 한국에서 불법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미국에서는 애플의 아이튠즈 스토어가 등장해 10억 곡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갔다. 결국 내려받기 서비스는 휴대폰 벨소리 시장으로 좁아졌고 스트리밍 서비스는 배경음악 등으로 한정되면서 음원시장의 수익은 저작권자가 아닌 이통사가 가져가는 구도가 되었고, 음원시장의 주도권도 유통업체인 이통사로 넘어가는 변화를 겪게 된다.

법무법인의 저작권 사냥으로 자살하는 청소년까지 생겨

저작권 문제는 저작권사냥꾼, 저작권파파라치라고 하는 법무법인의 저작권 무차별 고소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 음원을 올린 네티즌을 무차별 고소한 다음에 합의금을 뜯어내는 변호사를 말한다. 저작권 위반을 핑계로 경찰에 고소하면 경찰이 네티즌에게 고소 사실을 알려주고 합의보라고 말하게 되고 법무법인 직원은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저작권 고소 전문 변호사들은 값싼 아르바이트생을 이용해 미니홈피, 카페, 블로그, P2P, 웹하드, 공유 사이트를 뒤져서 한 건당 50~100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들이 진짜 문제가 되는 헤비업로더는 건드리지 못하고 저작권 개념이 없는 어린 학생을 협박한다는 점이다.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한 네티즌에는 중고생이 많은데, 아이들은 형사처벌한다는 협박과 합의금 요구에 고민하다가 자살하기도 한다. 실제로 2007년 11월에도 소설을 내려 받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고등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학생 C군은 인터넷 소설을 올렸다가 고소당한 뒤에 합의금 60만원을 내지 못해 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되었다.

그런데도 돈에 혈안이 된 변호사로 인해 고소 건수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광주시 교육청이 파악한 피고소 학생만 17명으로 2007년의 연간 2건에 비해 8.5배에 달하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고, 광주지역 경찰서에 최근 1년간 접수된 저작권 관련 고소의 47%인 633건이 10대를 고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는 2007년에 2만 5000건 정도가 발생했고 2008년에는 6만 건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검찰청 자료에 의하면 2008년 6월까지 접수된 것만 해도 3만 2446건이고 이중 불기소 처분된 것이 2만 9902 건이라고 한다. 불기소 처분의 상당수가 합의금을 낸 경우임을 감안하면 일 년에 6~1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저작권파파라치에 시달린다고 볼 수 있다.

고소 건수가 증가하면서 경찰서도 쓸 데 없는 서류심사에 인력을 많이 뺏기고 있다. 한 번에 100명을 고발하는 고소장이 들어오면 경찰로서도 일단 신원을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한 다음에 모두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범 소탕에 쓸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다. 경찰서마다 하루 평균 수십 건의 고소장이 들어온다.

저작권 단속의 합리적인 정책과 공유정신이 필요

저작권 문제는 기업에도 큰 고민거리다.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SPC)가 불법복제 단속을 할 때마다 작은 기업들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을 대피시키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기업에서 정품만 사서 쓴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깐 프로그램 때문에 천문학적인 벌금을 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업들이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무료라고 해서 집에서 쓰던 프로그램을 회사에 깔았더니 기업은 사서 써야 한다면서 저작권위반으로 고발되는 일도 많다.

저작권파파라치 변호사들이 정작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를 줄이는 방향보다는 돈을 뜯어내는데 혈안이 된 것처럼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저작권 단속도 불법복제를 줄이는 방향보다는 건수를 올리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문제다. 학생들이 저작권법을 잘 몰라서 고소된 가벼운 사안인 경우에는 1, 2회 경고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법복제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쳐줄 수 있다. 또한 기업도 저작권 위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면 경과를 들어보고 경고조치와 정품으로 교체를 유도해 감당하기 힘든 벌금을 물리지 않는 정책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공개프로그램이나 오픈소스와 같은 프로젝트에 의해 무료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Creative Commons)와 같은 라이선스를 통해 콘텐츠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도 저작권 문제 해결과 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해외 네티즌은 유명한 사진 공유 사이트인 플릭커를 통해 CC 라이선스 적용을 받는 사진을 찾아내 사용하기 때문에 사진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하는 일이 적다. 한국에서도 CCL을 적용한 사진공유 서비스가 많아진다면 무료로 사진을 쓰게 될 것이고, 저작권 고소를 당하는 일도 줄 것이다. 결국 저작권 문제는 콘텐츠 및 프로그램을 무료로 공유할 수 있는 공유문화의 확산과 정품을 제 가격 내고 쓰겠다는 바른 저작권 문화에 대한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시작한 유료 음원 서비스인 뮤직샵

국내에서 음원 관련 시장이 분쟁에 휘말리는 동안에도 성공적인 서비스가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싸이월드에서 2002년 7월부터 시작한 '뮤직샵' 서비스는 배경음악 서비스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유료 서비스가 되었다. 노래 한 곡당 도토리 3.5개(350원)를 내고 배경음악을 구입하면 자신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쓸 수 있는 뮤직샵은 미니홈피 열풍에 힘입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500원으로 가격이 인상되었으나 여전히 이용자가 늘면서 2005년 11월에는 1억 곡 판매라는 기록을 세운다. 배경음음악 서비스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유료화 모델이 되면서 다른 사이트에서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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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7 08:54
인터넷경매로 시작한 옥션, 오픈마켓을 이끌다

옥션이 문을 열면서 한국에서도 인터넷 경매 서비스 시작

1998년 4월에 ‘인터넷 경매’라는 사이트가 문을 열며 한국에도 인터넷 경매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1999년 10월에 지금의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옥션은 아주 짧은 문장에서 출발한다. 당시 옥션을 구상한 이재훈 씨는 책에 나온 한 구절에 생각이 꽂힌다. “온라인으로 은행 업무를 보는 것처럼 미래에는 경매도 인터넷으로 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보고 ‘그래 이거야’를 외친 그는 미련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와 창업을 결심한다. 그때 함께 창업한 사람이 나중에 ‘원어데이’라는 한개몰을 운영하는 이준희 씨다.

당시 주변사람은 모두 이재훈 씨를 말렸다. 눈으로 보고 얼마나 낡았는지를 확인하고 사는 중고물품을 보지도 않고 누가 인터넷으로 사겠냐는 반대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확신했던 이재훈 씨는 옥션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터넷 경매 사이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건을 올리는 판매자가 없어서 두 사람은 직접 판매자를 설득해서 물건을 얻어온 다음에 자신들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상품을 대신 등록해주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옥션은 성장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1년 1월에 이베이에 인수되면서 벤처대박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현재는 이베이에 인수된 옥션(www.auction.co.kr)


경매에서 오픈마켓으로 전환

옥션은 처음에 경매를 기본 사업으로 시작했으나 경매를 이용한 거래 규모가 크지 않았다. 중고물품 거래라는 것이 아무래도 신규상품 거래보다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모델을 점차 상점을 입점시키는 오픈마켓으로 바꿔나갔다. 옥션은 2002년부터 경매와 공동구매에서 온라인마켓플레이스로 사업모델을 변경하고 2002년 2/4분기부터 흑자로 전환한다. 그렇게 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인터넷에 물건을 올리고 사고 팔 수 있는 오픈마켓 시장이 열린다.

옥션이 장악한 경매 및 오픈마켓 시장은 한동안 도전자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터파크의 사내벤처인 G마켓이 도전장을 던지면서 상황은 반전한다. 1999년에는 인터파크의 사내벤처인 구스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G마켓은 옥션보다 뒤늦게 출발한 후발주자라는 단점을 안고도 2006년부터는 옥션의 매출을 넘어서는 역전을 일군다. 다양한 쿠폰 정책과 저렴한 가격 및 빠른 결제시스템을 무기로 오픈마켓 시장의 1위가 된 것이다. 그 외 CJ의 엠플, 다음의 온켓을 비롯하여 다양한 쇼핑몰과 오픈마켓이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G마켓도 옥션에 이어 이베이에 인수되면서 현재 한국의 오픈마켓 시장은 이베이의 독과점 체제에 SK텔레콤이 오픈마켓 시장에 뛰어들면서 만든 ‘11번가’가 대항하는 형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잠깐] 오픈마켓 시장의 확대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의 활성화는 인터넷 쇼핑몰 창업을 더욱 쉽게 만들어 주고 있다. 2004년 1월 온라인 쇼핑몰 개인 사업자는 1492개 사업체에서 2006년 6월 2695 업체로 1203개 늘어 2년 반 사이 약 80%가 증가했다. 유명 연예인의 창업도 늘었고, 수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쇼핑몰 운영자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2004년에는 고등학생이 인터넷 쇼핑몰을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를 차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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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02 09:42
1989년의 도서주문이 쇼핑몰의 원조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PC통신의 쇼핑 메뉴 서비스에서 초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89년 10월 데이콤이 교보문고, 환은신용카드와 공동개발한 도서주문 시스템을 천리안에서 서비스한 것이 첫 사례다. 통신상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한 후 3~4일이 지나면 주문한 책이 집으로 배달됐는데 이것은 지금의 인터넷 쇼핑과 같은 형태다. PC통신 거래는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의 홈쇼핑 메뉴에서 도서주문, 음반, 컴퓨터 관련기기 판매, 예약, 민원서류 발급으로 그 서비스 범위가 확대되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된 이후에도 PC통신에서는 장터가 남아 있었고 1998년 IMF 당시에는 알뜰 중고품을 사고팔기도 했다.

PC통신 이후 등장한 전자상거래는 초기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TV홈쇼핑 카탈로그를 온라인화한 형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매자는 인터넷 모니터를 통해 물건을 고르고 그 페이지에 있는 판매자의 연락처로 전화를 한다. 구매자는 물건을 팔 수 있는지 물어보고 이름과 주소를 알려준다. 그 후 무통장 입금으로 돈을 보내면 판매자가 소포로 물건을 보내주었다.

구매자는 열린 인터넷망을 사용해서 상품을 저렴하고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었기에 우리나라 전자상거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정부에서는 전자상거래의 안전성을 위한 법률을 정하고 제도와 기구를 마련해서 전자상거래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PC통신 시절의 온라인 홈쇼핑과 온라인 예약, 온라인뱅킹 서비스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를 위한 조치들

국내 전자상거래는 포항제철이 1987년 ‘전자문서교환(EDI; Electronic Data Exchange; 통신을 통해 전자화된 서류를 주고받는 기술)’을 쓰면서 전자거래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1993년 1월 ‘한국 EDIFACT(Electronic Data Interchange for Administration, Commerce and Transport; 행정, 상업 및 운송분야 관련 전자문서교환 국제표준)위원회’는 ‘한국EDIFACT표준원(KEB)’을 만들어 전자문서의 표준을 만들고 퍼뜨리는 데에 힘썼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EC; Electronic Commerce)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실제로 소비자들이 물품을 적극적으로 구입하면서부터였는데, 1996년 인터파크의 서비스 개시가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 전자 상거래 분야의 성장 잠재력을 인지한 정부는 전자상거래를 성장시키기 위해 여러 대책을 세웠다.

통상산업부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전자문서를 개발하고 ‘전자상거래지원센터(ECRC: Electronic Commerce Resource Center)’를 만들어 ‘칼스(CALS:기업간 전자거래 computer aided logistics support, commerce at light speed)’와 전자상거래를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시범 사업을 벌였다. 특히 전자, 자동차, 건설, 국방 4개 산업 분야에서 실시한 칼스 시범사업에는 100억 이상의 예산이 쓰였다.

2000년 2월 정부기관들은 ‘전자상거래 활성화 종합대책’을 세워 2003년까지 전자상거래 선진국이 될 계획을 짰다. 그러나 정부가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전문 인력을 키우지 못해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전자상거래가 점점 늘어나면서 전자상거래 분쟁도 늘어났다. 2000년 4월부터 산업자원부는 ‘전자거래 분쟁조정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전자거래 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분쟁조정 신청 건수는 2001년 457건에서 2005년 1750건으로 4배 가까이 증가할 정도로 위원회의 일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전자상거래 활성화 종합대책’을 세운 이후 정부 부처들은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범정부적으로는 전자상거래 인력을 양성하고 정부 전자 조달을 늘리기로 했다. 2006년 4월에는 산업자원부가 ‘2006 전자거래 촉진계획’을 세워 법과 제도를 개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외에도 각 정부 부처마다 중소기업을 지원하거나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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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1.08 15:01

한국 최초의 컴퓨터 범죄인 반포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 사건

한국 최초의 컴퓨터 범죄는 컴퓨터 도입기인 1973년 10월에 발생한다. 바로 서울 ‘반포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사건’이다. 이전까지의 부정이 사람에 의해 발생한 반면, 이 사건은 컴퓨터로 이루어진 부정이라는 점에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큰 화제와 충격을 주었다.

반포AID차관아파트는 미국 국제개발국(AID) 자금을 이용해 짓던 대규모 아파트로 입주 신청이 몰리자 입주자 선정을 컴퓨터를 이용해 추첨하기로 한다. 이때 용역을 맡은 곳은 과기처 산하의 중앙전자계산소(NCC)였다. NCC가 추첨을 맡게 된 이유는 당시 도입된 컴퓨터 중에는 가장 성능이 좋은 ‘유니백1106’을 보유한 정부산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이라 부정이 일어날 여지도 적었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곳에서 부정이 일어난다. NCC 소속 프로그래머인 정 씨가 수십 명의 입주신청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프로그램 처리과정을 조작하여 9세대를 당첨시킨 것이다. 고발만 아니었다면 조작은 발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추첨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능력 한계로 인해 추첨과정을 저장할 수 없었다. 즉 추첨과정을 콘솔장치(프린터)에만 출력시키고 처리과정은 디스크로 보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콘솔장치의 출력만 조작하면 증거가 남지 않는 일이었다. 정씨는 25장의 조작된 프로그램카드를 끼워 넣었다가 다시 빼내는 수법으로 조작 흔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다.

이 사건이 발각된 이유는 NCC 직원의 검찰투서 때문이다. 청탁을 의뢰했던 수십 명 중 상당수가 정씨와 가까운 사람이었고 이 중에는 NCC 직원도 많았다. 실제로 부정 당첨된 9세대 중 5세대가 NCC 직원이었다. 청탁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직원이 내부고발을 함으로써 완벽했던 범죄가 드러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컴퓨터 범죄인 이 사건은 컴퓨터 운영자나 프로그래머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큰 경각심을 주었다. 결국 컴퓨터도 사람이 조작하는 도구의 하나에 불과하며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flickr - michael-kay

한국인의 부동산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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