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e비즈북스 2012.05.30 13:39

<대한민국 IT사 100>에 이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서 당연히 전길남 박사님도 아시는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http://media.daum.net/digital/newsview?newsid=20120530110924054


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KIET, 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수십 명의 눈길 속에 키가 하나씩 눌러지고 마침내 화면이 뜨자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 사이의 인터넷이 개통된 것이다.
1982년 3월 2일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중형 컴퓨터와 당시 구미에 있었던 전자기술연구소의 중형컴퓨터를 1200bps 전용선으로 연결했다. 이 전산망을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이라 불렀고 이것이 한국 전산망의 시작이자 한국 인터넷의 시초다. SDN이 한국 인터넷의 시초인 이유는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TCP/IP 및 FTP, Telnet 등의 응용 프로토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월 15일, 마침내 서울과 구미 사이가 관통되면서 대한민국은 인터넷 원조인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인터넷 나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도 아닌 한국이 세계 두 번째 인터넷 국가가 된 것은 전길남 박사 덕분이다.


<대한민국 IT史 100>에서 발췌


참관인이 여러명 있었으니 누군가는 기억할 것 같은데 교차 검증을 해봐야 할 것같습니다. 5월15일이면 스승의 날이니 기억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IT사 100>의 저자이신 김중태 원장님께서도 한국의 IT 기록들이 부정확한 것들이 많다고 하셨는데 이런 역사적인 날도 이렇습니다. 이 책에서도 날짜같은 것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관계자분들께서는 그런 부분이 있으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책 내용을 계속 인용해보죠.

폐쇄적인 미국 인터넷을 세계인의 인터넷으로 바꾼 SDN
1983년에는 전길남 박사가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기면서 카이스트도 1983년 1월부터 SDN에 합류했다. 1983년 11월에는 SDN의 관리를 위해 카이스트에 네트워크 운영센터를 설치했다. 1987년에는 20여 개의 기관이 SDN에 연결되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카이스트에 설치되었던 네트워크 운영센터는 1987년 8월에 KAIST 외에도 한양대, ETRI, 데이콤 등 4개 기관으로 확대․설치되었다. 규모에 걸맞게 SDN을 통한 정보교류도 점점 활발해지면서 한국의 정보교류망 역할을 했다.


1983년 8월에는 네덜란드의 MCVAX, 10월에는 미국 HP연구소에 연결되면서 미국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미국 연결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의 보물창고였기 때문에 라우터 하나도 구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라우터는 흔한 장비지만 당시에는 미국과 동맹국을 맺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부 국가인 영국, 캐나다 정도에만 제공되었고, 공산권과 인접한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북한과 적대국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미국 정부는 기술 유출을 우려해 라우터 판매를 불허했다. 연구비가 없기 때문에 라우터 장비를 만들 수도 없었고, 결국 소프트웨어 방식으로 라우터 기능을 구현해 SDN을 미국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SDN은 폐쇄적인 미국의 인터넷 정책을 세계인의 인터넷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도 제공했다. 1986년 SDN 연구원은 X.25프로토콜을 통해 전용선 없이도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래서 미국 NIC에 IP주소 할당을 신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NATO 가입국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 외 국가의 인터넷 IP주소 할당은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을 운영하던 미국 과학재단은 인터넷을 세계에 개방하여 운영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아쉬운 것은 정작 개방 정책의 혜택을 먼저 누린 곳은 한국이 아닌 독일, 일본, 호주 등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비용을 이유로 1990년에야 직접 연결할 수 있었다. 1년 비용이 20만 달러(당시 2억 원)인데 그때까지도 인터넷의 필요성 자체를 이해 못한 한국 정부는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 기술의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한 한국통신이 이 비용을 부담했다.

1990년 4월에는 카이스트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하와이 대학과 56Kbps 전용선으로 연결했는데, 이를 위해 하나(HANA) 기구를 설립하고 하와이와 연결된 망을 ‘HANA망’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국내 인터넷망은 SDN으로 부르고, 해외 인터넷에 연결된 망은 하나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인터넷이 세계와 연결된 것이다.


참고로 한국 인터넷 개설 역사의 연표입니다.


[연표] 한국의 인터넷 개설 역사

1982년: 3월 2일에 SDN 망 연결

1982년: 5월 15일에 텔넷 로그인 성공

1983년: 1월에 ‘KAIST’가 SDN에 연결됨

1983년: 8월에 네덜란드와 연결

1983년: 10월에 미국 HP연구소와 연결

1983년: 11월에 SDN의 관리를 위해 ‘KAIST’에 네트워크 운영센터를 설치

1990년: 4월에 하와이와 연결되며 하나망 구축



대한민국 IT사 100

저자
김중태 지음
출판사
e비즈북스 | 2009-10-2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한국은 어떻게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개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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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1.07.08 11:31


온 국민이 함께 즐기는 캐주얼 게임
롤플레잉 방식의 온라인게임은 초보자가 하기 쉽지 않은 게임이지만 방향 키 몇 개로 조작하는 캐주얼게임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으며 귀여운 캐릭터와 다양한 아이템으로 사용자를 유혹한다. 이 때문에 캐주얼 게임은 모든 국민이 즐기는 게임으로 사랑받는다.

국민게임이라 불렀던 첫 번째 게임은 1999년에 나왔던 ‘포트리스2’다. 포트리스는 탱크끼리 대포를 쏘는 게임으로 규칙이 단순하고 그래픽이 깜찍해 여성 이용자도 즐겼던 게임이다. 원래 도스 시절부터 ‘캐논’이라고 하는 단순한 그래픽 방식의 대포게임이 존재했다.
 이 게임을 온라인 대전게임으로 확장한 것이 포트리스다. 포트리스는 2001년 10월에는 국내 최초로 1000만 가입자를 넘기고 동시접속자 10만 명을 기록하면서 원조 국민게임의 자리를 차지했다.
 CCR은 원래 게임회사가 아니라 ‘X2웹’이라는 맞춤형 웹브라우저 및 서치엔진을 개발하던 SI 업체다. 1995년에 문을 연 CCR은 웹솔루션 업체로 명성을 떨쳤으며, 회사의 기술력을 증명하기 위해 넷츠고에 포트리스 게임을 제공한다. 게임이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랬던 게임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정식 서비스로 독립하게 되었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SI업체에서 게임회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어서 등장한 국민게임은 2004년 3월 베타서비스로 등장한 ‘카트라이더’이다. 역시 간단한 조작만으로 즐길 수 있다는 이유로 포트리스에 이어 두 번째 국민게임으로 발돋움했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중년의 성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면서 카트라이더 아이템은 불티나게 팔렸고, 업그레이드된 자동차는 100만 원을 넘어갔다.

고스톱이 온라인으로 들어와 온오프라인 통합 국민게임을 차지하다
그러나 온오프라인을 통합한 국민게임은 역시 고스톱이다. 포트리스가 나왔던 1999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게임포털 ‘한게임’에서 다양한 보드게임의 하나로 ‘온라인 고스톱’과 포커 등을 시작한다. 전 국민이 즐기던 고스톱이 온라인으로 등장하면서 고스톱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오프라인 고스톱의 쇠퇴다. 사람이 모였다 하면 장소 불문하고 담요를 깔고 자리를 펼치던 고스톱 게임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스톱 한 판 치자”고 조를 필요 없는 편리함에 빠지면서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온라인 고스톱을 즐기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최고의 국민게임이던 고스톱이 온라인 고스톱으로 등장하면서 일어난 변화 중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중장년층의 유입이다. 초기에는 주로 중장년층 아저씨들이 온라인 고스톱에 빠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집에서 일을 끝내고 여가 시간으로 즐거운 일을 찾던 중년 아줌마들이 고스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중년여성층에서 거의 유일하게 즐기는 게임이자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이 온라인 고스톱이다.
결국 온라인 고스톱은 인터넷에서도 최고의 국민게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담요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화투 한두 장이 모자라 동네 가게에 가서 한 벌 더 사오던 심부름도 사라졌다. 온라인 고스톱은 아줌마 아저씨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을 모니터 앞에 앉힌 게임이 된 것이다.

기존 고스톱을 그대로 온라인에 옮겼던 초기의 고스톱은 한 차례 큰 변신을 한다. 2002년 10월부터 ‘맞고’ 서비스가 시작된 것이다. ‘맞고’는 3명이 필요했던 기존 고스톱과 달리 2명으로도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함으로써 ‘3명 성원’이라는 고스톱 게임을 2명의 대결 문화로 바꾸었다. 한 판을 즐기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판돈은 더 커지면서 ‘한 방’이 판을 치게 되었다. 도박성이 더 강해지면서 고스톱을 둘러싼 도박머니가 유통되기 시작했고, 각종 문제점이 사회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온라인 특징에 맞게 진화된 ‘맞고’는 기존의 단조로운 고스톱 대신 국민게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맞고는 계속 진화하여 두 벌의 화투로 치는 ‘더블 맞고’를 비롯하여 다양한 맞고 게임으로 변화하며 국민게임의 자리를 유지한다. 최근에는 각종 연예인의 얼굴과 음성을 이용한 연예인 맞고가 유행을 탔다. 그러나 오프라인의 도박문화에서 벌어지는 현상도 온라인으로 이전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재미만큼이나 도박으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게 표출되고 있다. 게임과 도박 사이에서 지금도 맞고는 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카트라이더나 맞고를 제외하고도 수없이 많은 온라인게임이 서비스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운동장에 나가서 농구와 축구를 즐기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몸을 쓰기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 많아지는 문화로 바뀌었다. 결국 컴퓨터가 준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은 건강과 여유, 만남을 포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컴퓨터 문화가 편리함을 주기 위해 발전해왔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의 건강과 만남도 챙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대한민국IT사100파콤222에서미네르바까지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영전략 > IT경영
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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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1.07.07 10:15

수십만 명에 이르는 명의도용 피해 발생
2006년 2월에 발생한 온라인게임 ‘리니지’ 서비스의 대규모 도용사태를 통해 게임 작업장과 아이템 시장에 대한 실체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리니지 게임 명의도용 사태의 원인은 게임업체의 허술한 정보 관리 및 아이템 현금화에 대한 게임 특성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템 현금화에 대한 대책이 없는 한 제 2의 리니지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리니지 아이템의 경우 하루 1만 건에 10억 원 이상이 거래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나 국내에서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리니지 아이템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판매하는 이른바 ‘작업장’ ‘공장’이 성행했다. 이를 위해 많은 계정 생성이 필요하고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계정을 생성하는 명의도용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리니지는 1998년 9월에 등장해 국내 온라인게임 중에서 최고의 히트작이 된 게임이다. 리니지는 성인 그래픽과 강한 중독성으로 큰 인기를 모으면서 2000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동시 접속자 10만 명을 돌파한 게임이 되었다. 이후 리니지는 미국, 중국, 대만 등으로 수출되면서 한국을 온라인게임의 강국으로 올려놓는데 큰 기여를 한다.



당시 내 후배들도 리니지에 푹 빠졌는데, 게임 자체의 재미에 아이템을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추가되면서 더욱 큰 중독성을 갖게 되었다. 사용자는 최고 수준인 레벨50에 오르기 위해 게임에 빠져들었고, 빠른 레벨 상승을 위해서 아이템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가입자가 늘면서 리니지 게임 안이 하나의 사회가 되었고 길드끼리 전투 및 게임 속 화폐인 아데나의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게임 속 사회가 일종의 가상사회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특히 공성전을 통해 길드끼리 성을 빼앗기 위한 치열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서 길드 구성원 사이의 단결력이 필요해졌고, 커뮤니티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리니지 도용사태로 드러난 아이템 거래 시장의 문제점
리니지 사태는 그동안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묻어두던 문제 중에서 빙산의 일각이 터진 것에 불과하다. 언제 터지냐가 문제였던 여러 문제 중 피해가 크지 않은 사건 하나가 터진 것이었다. 주민등록번호 명의도용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게임업계들이 재점검을 통해 문제가 될 여러 부분에 대한 논의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오래 전의 지존파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인터넷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한 개인정보를 공공연하게 사고파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회원 가입 때 주민등록번호를 받아두는데, 이런 정보가 회사 매각, 인수 합병을 통해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기도 하고 회사 내 직원에 의해 외부로 빼돌려지고 있다. 약간의 돈만 사용한다면 불특정다수의 개인정보를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명의를 도용하려는 집단은 흔히 작업장 사람들로 부르는 아이템거래 상인이다. 이들은 PC방이나 또는 별도의 작업장 또는 작업방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리니지를 비롯한 유명 온라인게임의 아이템을 획득한 다음에 이를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번다. PC방이 한 시간에 1000원을 받고 하루 10시간을 손님이 좌석 점유한다고 할 경우 겨우 1만 원을 버는 것에 불과하지만 게임고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고용해 아이템을 획득하게 하고 이 아이템을 몇십만 원에 팔아서 나누어 가질 경우에는 몇십만 원을 벌 수 있다. 좀 더 빨리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 이름으로 많은 계정을 만들어 서로 돕고 밀어주기를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명의도용을 해서 여러 계정을 만드는 것이다. 2008년 초 기준으로 작업장 숫자는 1000개로 추정하고 있다.

아이템이 중요한 이유는 아이템이 주는 만족감과 편리함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20번을 칼질해야 죽는 괴물을 계속 상대하다보면 짜증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단 한 칼질로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마법칼 아이템을 사용해볼 경우 느끼는 만족감이나 편리함은 단순 산술적 수치로 20배나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멋진 아이템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주는 멋도 있다. 그래서 한 번 아이템이 주는 통쾌함과 편리함, 과시감을 맛보면 아이템중독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템 거래의 경우 칼과 방패는 몇십만 원에 거래되기도 하고, 뮤 게임에서는 지팡이 하나가 1000만 원, 문제가 된 리니지의 경우에는 성 하나가 5000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아이템 거래액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다못해 캐주얼게임이라고 부르는 카트라이더의 경우만 하더라도 레벨업이 된 자동차는 사용자끼리 200만 원에 거래되기도 할 정도다.

아이템 시장은 온라인광고 시장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한국 내 아이템 현금거래시장 시장 규모는 2004년의 5393억 원에서, 2006년에는 8307억 원, 2007년에는 1조 원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런 시장 성장세 때문에 현재 130여 개가 넘는 중개사이트가 성업 중이다. 온라인게임 아이템중개업체인 아이템매니아와 아이템베이의 2008년 수수료 매출만 463억 1000만원에 달한다. 통상 수수료가 4~5%인 것을 감안하면 두 업체의 거래규모만 1조가 넘었다는 뜻이다. 수수료가 포함되지 않는 이벤트 거래까지 감안하면 거래액은 더욱 커진다. 아이템베이 등의 공개된 시장을 통해서만 대략 1조 2천억 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도박 사이트용 사이버머니를 비롯한 음성적 거래 시장을 포함한다면 몇 조원 대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서비스 중에는 서비스 매출보다 아이템 거래액이 더 많은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엔씨소프트의 '리지니' 게임의 경우 2008년 매출액은 1126억 원이었으나 리니지의 아이템 거래액은 1700억원이 넘은 것으로 파악됐다. NHN이 서비스하는 RS 역시 게임 매출은 200억 원에 불과한 반면 아이템 거래액은 600억 원에 달한다. 2009년 최고 흥행작인 아이온 역시 서비스 매출보다 아이템 거래액이 많은 상황이다.
아이템으로 인한 개인명의 도용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사이트에서 개인정보를 요구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지만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 실명확인을 요구하는 국내 서비스 방침 때문에 명의도용 사건은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잠깐] 편의점에서 파는 사이버 도토리, 사이버에서 돈 벌고 소득세 안 내는 조직

아이템 시장이 활황을 누리면서 캐릭터 육성시장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싸이월드의 사이버 도토리는 하루 수익이 1억 5천여만 원이나 되는데 24시 편의점에서도 도토리를 판매한다. 사이버 상의 화폐가 실물경제에서 그대로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작업장의 경우 한국의 온라인게임인 '리니지'용 사이버머니인 '아덴'을 팔아서 100억 원의 소득을 올려 세금을 탈루한 조직이 적발되어 국세청이 조세포탈 용의자 이모  씨(55)에게 부가한 세금만 109억 원을 기록했다. 사이버 공간을 통해 돈을 벌고, 현실 공간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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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1.07.04 10:19

잠자리 베스트5 사건으로 떠오른 개인정보 침해의 위험성

1993년 12월 24일 새벽 2시 조금 넘은 시간. 하이텔의 BEST5게시판에는 NEWorder이라는 또이름(ID)을 가진 사람의 ‘BEST5’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관계한 여성에 대한 화려한 경험담이었다. 문제는 BEST5가 잠자리를 기준으로 5명의 여성을 평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담패설보다 더 진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글이었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 출연한 여성들의 이름과 직장, 자신과의 관계를 전부 밝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글이 실화라고 가정할 때, 이 남자와 여성들을 아는 사람이 그 글을 봤다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가명등록이 어려운 하이텔이라는 점과 이 사람이 자신의 치부임에도 불구하고 술김에 들어와 쓴 글이라는 점에서 글의 내용은 실화일 가능성이 컸다.

이전에도 하이텔을 비롯한 여러 통신망에는 적지 않은 음담패설과 야한 소설들이 올라왔다. 편지기능을 통해서 음란소설을 무차별 보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스개란에 음담패설을 연달아 올린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밝힌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가 손쉽게 일어날 수 있으며, 이렇게 침해된 내용이 온라인을 통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하이텔을 비롯한 서비스 업체에서는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개인이 올리는 글 하나하나를 모두 감시하다가 지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며, 올리기 전에 예방할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개똥녀 사건으로 개인정보 공개 범위에 대한 논란은 계속

잠자리 베스트5 사건은 아무 죄 없는 개인정보의 공개라는 점에서 명백하게 범죄라 할 수 있는 행위다. 그러나 범죄자 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형태로 개인정보 및 사생활, 초상권, 인격권 침해 사례가 등장하면서 사이버 상에서 보호되어야 할 개인의 권익은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논란 중이다.

2002년에는 아동 성범죄자의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네티즌이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네티즌들은 성범죄자의 홈페이지에 사이버 테러를 가하거나 이메일, 쪽지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 대한 선정적인 패러디물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되면서 해당 정치인에 대한 초상권, 인격권 침해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개인의 정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이른바 ‘개똥녀’ 사건이다. 개똥녀는 2005년 6월 초에 애완견을 데리고 지하철에 탔다가 애완견이 싼 똥을 치우지 않고 내린 어떤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가 인터넷에 신상이 공개된 개똥녀

지하철에 개를 안고 타는 것도 불법이며 개를 데리고 다닐 때는 상자 안에 넣어서 다니게 되어 있는데도, 지하철에 내놓고 탔을 뿐만 아니라 개가 변을 볼 것 같자 자기 가방이 아닌 바닥에 똥을 싸게 한 것만으로도 예의 없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주변 사람이 똥을 치우라고 했는데도 정작 이 여성은 자기 애완견의 똥구멍만 깨끗하게 닦고 바닥의 똥은 치우지 않아 주변의 다른 사람이 대신 치웠다. 주변사람이 똥을 안 치운다고 비난하자 내리면서 오히려 화를 내고 욕을 했고, 마침 같이 탄 한 네티즌이 사진과 함께 사연을 올리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 사진에 여인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람에 네티즌들의 지탄을 받으며 순식간에 마녀사냥을 당하고 개인적인 인격이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똥녀도 나쁘지만 얼굴을 가리지 처리하지 않고 사진을 올린 사람도 비난을 받기 시작했으며, 일방적으로 개똥녀를 몰아붙인 네티즌도 마녀사냥에만 나선다는 비난을 받으며 네티즌의 행동양식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해외에까지 소개되면서 개인의 인격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느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7월 7일에는 워싱턴포스트지에 기사가 실렸고, 7월 11일에는 위키피디아에 ‘개똥녀(Dog Poop Girl)’라는 이름으로 해당 사건이 정식항목으로 등록되었다.

개똥녀 사건이 일어나던 해에 산부인과의 간호조무사들이 신생아 학대 사진을 올려놓음으로써 네티즌의 비난이 쏟아진 사건이 일어났고, 연초에는 연예인X파일 사건이 터졌었다. 또한 모 전경부대의 '알몸 진급식' 사진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인권실천시민연대가 군대 내 ‘가혹행위’ 사진을 무더기로 공개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당사자의 사진이나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더 큰 침해 행위가 아니냐는 논란도 반복해서 일었다.

포피모를 탄생시킨 자살사건과 실명 공개

연예인 X파일, 개똥녀, 간호조무사 등의 사건이 일어난 2005년에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하나 더 발생한다. 5월에 발생한 한 여성의 자살사건이 발단이었다. 사건은 자살한 서 씨의 어머니가 죽은 딸의 미니 홈피에 ‘헤어진 남자친구 K씨 때문에 자살했다’며 그동안의 사연을 올림으로써 확대되었다. 딸을 유산까지 시켰던 K씨가 헤어지자고 하자 화가 난 어머니가 K씨의 뺨을 때렸고, K씨는 어머니를 폭행죄로 고소했으며 이를 괴로워하던 딸이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 수십만 명의 네티즌들이 열람하게 되었다. 이 글이 올라오자 네티즌은 K씨를 살인자로 몰았고, K씨의 정체를 밝히기 시작했다. 글이 올라온 후 이틀 만에 K씨의 실명과 전화번호, 주소, 회사, 가족사항 등 신상명세가 인터넷에 유포되기 시작했고 K씨에게는 물론이고 K씨가 다니는 회사에까지 K씨를 해고하지 않으면 불매운동을 하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K씨는 사표를 내고 네티즌과 포털사이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5월 7일에 포피모(포털 피해자를 위한 모임)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포털사이트의 개인정보 노출로 인권 피해를 입었다면서 포털사이트에 대해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의 발표를 한다. 포피모에서 서 씨 자살사건으로 실명이 공개되어 시달림을 당한 K씨는 허위사실을 담은 글로 인해 개인정보가 유포되고 협박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면서 포털의 방조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서 씨와 K씨 사건은 포피모라는 모임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털의 책임에 대한 기준이 어디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이 사건은 한창 논란이 되고 있던 실명제 도입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선이 되었기 때문에 포털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개인정보 보호 문제는 기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9월 13일 문화일보가 신정아 씨의 누드사진을 공개함으로써 황색언론 논란에 휩싸이는가 하면 살인범 강호순의 얼굴을 둘러싸고도 큰 논쟁이 일었다. 강호순 같은 살인마를 비롯하여 범죄자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범인을 빨리 잡고 재발 피해를 막는 것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강호순의 친척과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라는 주장이 맞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사회적 공론을 형성해 풀어야할 가치관의 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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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가 문을 열다.

1999년 9월 1일에 커뮤니티 서비스 싸이월드(www.cyworld.com)가 오픈했다. 지금은 한국 최고의 커뮤니티 사이트로 성장하면서 각종 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싸이월드지만 한 동안은 작은 사이트에 불과했다. 싸이월드가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인 ‘미니홈피’를 선보인 것은 2001년 9월 17일. 미니홈피는 기존의 커뮤니티를 획기적으로 바꾼 개념이다. 가장 큰 변화는 카페에 모여 집단으로 활동하며 남들이 올린 자료를 보던 커뮤니티가 개인 위주의 1인 커뮤니티, 자신의 공간에서 보여주는 1인 매체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프리챌의 유료화 파동 이후 급성장한 뒤에 SK커뮤티케이션즈에 합병되면서 그 힘이 더욱 커졌다. 이제는 싸이월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미니홈피를 선보인 지 만 3년 만인 2004년 9월에는 싸이월드 가입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서비스 시작도 9월, 미니홈피 시작도 9월, 1000만 돌파도 9월이니, 9월은 싸이월드와 인연이 깊은 달이라 할 수 있다.

프리챌 지고 싸이월드 뜨다
싸이월드가 미니홈피 1위를 하기 전에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커뮤니티 사이트는 다음 카페와 프리챌(www.freechal.com), 세이클럽 등이었다. 다음 카페는 동아리 성격을 지닌 반면 세이클럽은 싸이월드와 거의 모양이 같은 미니홈피를 서비스했다. 특히 프리챌은 충성도 및 아바타 등의 다양한 아이템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던 중이라서 향후 기대되는 커뮤니티였다. 그러나 프리챌은 2002년 11월 14일에 유료화를 밝히고 이를 기점으로 몰락하고 만다. 사실 프리챌 유료화의 문제는 유료화 자체가 아니라 접근방법의 문제였다. 프리챌이 기존의 서비스를 그대로 무료로 유지하면서 신규 기능을 내세우고 새로 나온 기능만 유료로 제공했어도 유료화는 충분했던 상황이었다. 그만큼 프리챌의 사용자 충성도가 높았고, 유료화에 대한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프리챌은 커뮤니티 사이트로는 드물게 월 13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리챌은 유료화를 발표하면서 유료화되지 않는 커뮤니티의 자료는 모두 삭제하겠다고 말한다. 이 발표가 프리챌 유료화에 대한 반발을 불렀다. 커뮤니티라는 것은 수 년 동안 동아리 지기의 땀과 동아리 회원의 협력으로 일군 결과물이다. 또한 이런 결과물 덕분에 커뮤니티 사이트가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 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자료를 삭제하겠다는 프리챌의 고압적인 자세는 회원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렀고, 안티프리챌 사이트를 등장시켰으며 많은 커뮤니티가 떨어져나가는 계기를 제공했다.
프리챌 유료화 반발 운동은 생각보다 거셌고 상대적으로 싸이월드가 가장 큰 덕을 봤다. 싸이월드의 클럽 개설 수가 2000개 이상 증가한 것이다. 싸이월드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세이클럽, 카페24 등도 덕을 봤다. 결국 프리챌 유료화는 시장 1위인 프리챌에게는 몰락의 시작이 된 반면 싸이월드에게는 시장 장악의 전기가 된다.




[잠깐] 아이러브스쿨의 부상과 몰락
인터넷 거품 때 가장 유명한 커뮤니티 서비스 중 하나는 동창생 찾기 서비스인 아이러브스쿨(www.iloveschool.co.kr)이다. 1999년에 설립된 아이러브스쿨은 한동안 국내 인터넷 서비스에서 최고의 화제였다. 친구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10년 만에 아무개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술자리의 기본 안주였을 정도였다. 신문에는 연일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만난 동창들이 불륜관계로 발전한다는 기사가 넘쳤다. 그만큼 아이러브스쿨은 화제의 사이트였다.
아이러브스쿨은 개방성만 추가해 인맥교류 사이트로 전환했다면 최근 성장한 미국의 페이스북처럼 멋진 SNS 서비스로 발전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그러나 동창생에서 머문 것이 패인이 되었다. 일관된 정책을 펴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2000년에 야후로부터 700억 원의 인수 제의를 받을 정도로 잘 나갔을 때 팔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되었다. 결국 2001년에는 119억 원을 출자한 서울이동통신에 인수되지만, 2001년 한 해 동안에만 3차례나 경영권이 바뀔 정도였으니 서비스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이러브스쿨은 창업자인 김영삼 사장과 정현철 금양 사장, 서울이통의 박차웅 사장, 새로 부임한 김상민 사장, 현명호 사장 등이 얽히고설키는 경영권 싸움에 휩싸이면서 몰락을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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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1.01.10 10:09
닌텐도에 맞서려는 한국산 게임기

게임기 열풍이 불었던 1990년을 그냥 보낸 일은 아쉬워


닌텐도는 현재 닌텐도DS와 닌텐도Wii(위)라는 게임기로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이다. 국내에서도 닌텐도 이야기는 정치권에서까지 언급될 정도여서 닌텐도에 대항할만한 게임기를 우리도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외국산 게임기에 맞서기 위한 게임기 개발은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1990년을 전후로 한국에는 TV에 연결해 사용하는 비디오게임기 보급 열풍이 분 적이 있다. 패밀리게임기 또는 패미컴, 슈퍼콤이라고 부르는 비디오게임기는 당시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하나씩 다 보급될 정도로 유행이었다. 국내 전자업체라면 모두 게임기 판매에 뛰어들었고 TV에는 게임기 광고가 쏟아졌다. 삼성의 수퍼알라딘보이와 현대 슈퍼컴보이, 대우전자 재믹스PC셔틀 등 다양한 회사에서 게임기가 쏟아졌다. 그때 내 친척이 다니던 해태전자에서도 바이스타라는 16비트 게임기를 만들었을 정도로 당시 열풍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 열풍이 국산게임기 개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만약 그때 조금 더 게임기 개발에 집중했다면 국내에서도 좋은 비디오게임기가 등장했을지 모른다.

닌텐도에 맞서려는 GP2X와 열악한 소프트웨어 환경

그러나 국산 게임기 개발에 도전하는 업체들이 최근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임베디드 리눅스 기반 휴대용 비디오게임기 개발사인 게임파크홀딩스가 개발한 휴대용 게임기 GP2X 시리즈가 대표적으로 GP2X는 2008년에 약 15만 대 정도의 판매를 기록했다.

사실 GP 시리즈는 2001년부터 출시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1년에 휴대용 게임기인 GP32가 발표된 것이다. 당시 GP32는 닌텐도 GBA보다 우수한 성능에 개발툴까지 공개하여 멀티미디어 플레이어와 각종 콘솔 게임 에뮬레이터, 그리고 사용자들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용도로 인해 어느 정도 인기를 모았었다. 몇몇 서드파티 게임 제작사에서도 전용 게임이 여럿 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닌텐도와 같은 거대 게임회사의 기기와 상대할 수는 없었고 우리나라와 유럽 쪽의 해커들 위주로 틈새시장을 형성하는데 그쳤다.

결국 후속기종을 내놓지 못하고 혼란을 겪다가 제품 생산을 맡았던 파트는 게임파크로 남고 마케팅을 맡았던 파트가 게임파크홀딩스로 독립한다. 그 후 게임파크는 GP32 후속기로 본격 휴대용 게임기라는 XGP의 개발에 착수했고, 게임파크홀딩스에서는 PMP기능을 강조한 GP2X라는 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선보이며 둘은 각각 별개의 노선을 걷게 된다..

게임파크홀딩스가 내놓은 GP2X는 사실 휴대용 게임기로 팔린 것이 아니다. '깜빡이 학습기'라는 이름의 학습용 PMP로 팔린 것이다. 그러다가 정부의 닌텐도 언급이 나오자 GP2X Wiz라는 제품으로 출시하는 것이다.

한국산 게임기로 도전장을 내고 있는 GP2X WIZ

겜브라스도 휴대폰 게임 이용한 시장 따로 게임 준비

한편 갈라섰던 게임파크는 XGP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망했고, 그 후 겜브라스라는 회사로 바뀌어 '딩키'라는 제품을 만들었다. 이후 TU미디어와 공동 개발을 통해 휴대폰용 모바일 게임 콘텐츠를 주력으로 공급하고, 이후 위성DMB 네트워크와 연동된 콘텐츠 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TU미디어는 겜브라스와 공동으로 한국게임산업진흥원 글로벌 게임허브센터의 10대 과제 중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 다중플랫폼 구축` 분야에 선정되면서 한국형 닌텐도를 꿈꾸며 개발을 진행하게 된다. TU미디어는 새로운 게임을 개발할 소프트웨어 환경이 구축되지 않았지만 이미 기존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2000종에 달하는 휴대폰용 게임 콘텐츠를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 닌텐도와 차별화하기 위해 실시간 방송 연동형 게임을 개발하고 휴대용 기기(휴대폰, PSP, 넷북, MID 등) 간 근거리 네트워크 게임도 공동 개발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향후 위성DMB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 게임과 쇼핑을 집중 육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티유미디어는 사업 초기부터 앱스토어를 구축해 개방형 시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개발자 지원 사이트를 만들고 개발 소스 코드를 공개해 영세한 모바일 게임 업체도 손쉽게 위성DMB와 결합된 휴대용 게임 콘텐츠 개발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뿐만 아니라 게임기도 진동모터, 패턴인식, 멀티터치, 동작센서, 음성인식 등의 기능을 탑재해 닌텐도나 소니 휴대용 게임기와 경쟁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닌텐도와 같은 게임기는 하드웨어 개발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하드웨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뛰어난 소프트웨어인 게임이 없으면 하드웨어 자체가 보급되지 못한다. 환경도 중요하다. 정품 게임을 구입하려는 게이머들의 바른 정품문화도 필요하다. 창의적이면서도 열정적인 개발자도 많이 등장해야 한다. 때문에 국내 패키지게임시장과 비디오게임 시장이 전멸한 환경에서 좋은 성능의 하드웨어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닌텐도DS나 닌텐도Wii와 같은 게임기가 나오려면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이 먼저 필요하다. 더불어 국민들의 정품 사용 인식 향상도 필요하다. 그런 후에 국산 게임기가 나온다면 한국에서도 닌텐도와 같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정말 독특했던 바코드배틀러
국내에 나온 게임기 중에서 독특함으로 잊히지 않는 제품이 있다. 바로 ‘바코드배틀러’라는 게임기다. 이 게임기 소개를 보면 ‘모든 상품에 표시되고 있는 바코드를 캐릭터(전사와 마법사)와 아이템으로 변신시켜 싸우는 경이의 아이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정말 경이적인 아이템이었다. 바코드배틀러는 본체 외에 주인공카드, 적카드, 화이트카드, 공략본 등으로 구성되어 7만 7000원에 팔렸다. 구성 내용을 보면 훗날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끈 유희왕과 비슷하다.

현실 확장 게임인 바코드배틀러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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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30 10:21
웜바이러스로 인터넷 대란 발생

1.25 인터넷 대란 발생

2003년 1월 25일 윈도 서버(MS SQL서버 2000)의 취약점을 활용한 슬래머 웜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웜바이러스로 인해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ISP의 일부 DNS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에서도 유선 인터넷은 물론이고 무선 인터넷과 행정전산망까지 모두 불통되는 사상 초유의 인터넷 재난이 발생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2003년 2월 18일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조사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내에는 전 세계 감염대수 7만 5000여 대의 11.8%에 해당하는 8800여 대가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시작은 미약했다. 2003년 1월 25일에 한국통신 혜화전화국의 DNS(Domain Name System)에 처리 가능한 용량 이상의 대량 데이터가 유입되면서 '1.25 인터넷침해사고'가 시작되었다. '1.25 인터넷침해사고(인터넷 대란)'는 고작 크기가 367 바이트에 불과한 'SQL슬래머' 라는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데이터베이스의 보안 취약점을 악용하여 네트워크에 흘러들어가는 데이터 전송량을 급증시킨 것이다. 그 결과 오후 2시부터 모든 인터넷접속이 9시간가량 마비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슬래머 웜바이러스 이후에도 2003년 8월 12일의 블래스터 웜(Blaster worm)을 시작으로, 18일의 웰치아 웜(Welchia worm), 그리고 엄청난 양의 스팸 메일을 보내고 있는 소빅.F 웜(Sobig.F worm)에 이르기까지 한 주 사이에 강력한 웜 세 종류가 한꺼번에 공격하는 일이 발생해 국내 전산 담당자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flickr - Joffley


사이버 대란에 대한 경각심 일깨운 사건

1.25 인터넷침해사고는 이미 사회적 생활의 상당부분을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한 순간에 인터넷이 마비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고 정부와 민간 기업에 경각심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로, 정부는 인터넷침해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수립, 시행해왔다. 보안에 대한 취약성과 관리소홀 방지를 위한 국가사이버안전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또한 인터넷진흥원에 일부 인터넷 선발국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최상위도메인네임서버(Top Level Domain Server)를 유치하여 국내DNS의 효율적인 관리기반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와 더불어 정보의 안전한 유통을 위한 정보보호에 필요한 시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98년부터 운영했던 한국정보보호진흥원(www.kisa.or.kr)의 업무를 보다 강화하여 신종 인터넷 정보침해사고방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침해사고가 일어난 1년 뒤인 2004년 1월에는 국가사이버안전센터(www.ncsc.go.kr)가 설립되었다. 국가사이버안전센터는 사이버공격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고, 국가전반의 정보보안업무를 담당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잠깐] 이은주 씨 자살 소식으로 인터넷 속도 저하 현상 발생

2005년 2월 22일에 영화배우 이은주 씨 자살 소식이 전해지자 한 동안 국내 인터넷 속도가 크게 느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특히 포털이나 뉴스사이트 쪽은 트래픽 문제로 화면이 느리게 뜨거나 아예 안 뜨는 곳이 생길 정도였다. 일부 사이트는 관리자 화면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서버에 부담이 심했다. 인터넷구더기(인터넷웜)이나 바이러스, 통신선로의 문제 등이 아닌 순수하게 사용자 트래픽으로 인해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은주 씨 자살 소식으로 인한 국내 인터넷 속도 저하현상은 연예인에 대한 국내 네티즌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사실과 신문이 아닌 인터넷으로 뉴스를 얻는 인터넷 시대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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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22 09:37
8비트 키드를 만든 애플과 MSX

애플, 삼보, MSX와 교육용PC

최초의 PC인 애플이 발표된 이후 시장에는 다양한 PC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PC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고 단지 기종 이름만 사용됐었다. 당시 국내에서 보급되던 PC는 ‘SPC-1000’과 ‘패미콤’을 비롯한 국내 5개 사의 교육용 PC와 애플II, IBM-PC, MSX 등 크게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그 외 탠디의 ‘TRS80’ 미국 오스본의 ‘오스본’, 삼보의 ‘SE8001’, 코모도어, 아타리 등도 등장했다.

이 중에서도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던 제품은 역시 MSX였다. 국내에서 MSX가 인기를 끈 이유는 MSX에서 돌아가는 일본산 게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애플과 삼보 트라이젬의 경우 성능은 좋지만 워낙 고가품이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고, IBM-PC는 더 비쌌다. 또한 IBM-PC는 기업용이라 학생들이 좋아할 소프트웨어가 많지 않았다. SPC-1000을 비롯한 교육용 PC는 가격이 싸서 많이 구입했지만 MSX처럼 게임이 많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MSX 기종이라는 아이큐1000. 애플과 마찬가지로 게임용으로 주로 사용했다.

부모들은 교육용컴퓨터라고 해서 사줬지만 아이들은 컴퓨터를 게임기로 사용했다. 1980년대에 보급된 애플II, MSX, MSXII를 업무용이나 프로그램 개발용으로 사용한 아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이 자라서 8비트 키드라고 하는 국내 IT산업의 중추 인재가 된다. 이들은 애플과 MSX, SPC-1000 등의 보급으로 컴퓨터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학습’이라는 컴퓨터잡지를 보면서 개발자의 꿈을 키웠다.

어느 기업이나 만들 수 있는 공개규격 PC였던 MSX

삼보와 애플, IBM의 구도 사이에 등장한 MSX는 사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상한 존재였다. MSX는 1983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ASCII)가 공동 주창해 제정한 표준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PC다. MX는 표준규격으로 공개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만들 수 있는 PC규격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본체, 키보드, 화면, 주변장치 인터페이스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 점은 다른 PC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MSX는 두 가지 특징을 지녔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관여한 탓에 어떤 기종에서도 소프트웨어가 호환되었다. 즉 어떤 회사에서 설계하더라도 표준 규격대로 만들면 모두 호환이 되었다. 또한 PC 설계에 대한 특허료를 받지 않고 설계 규격을 공개한 공개용 PC라는 점이 큰 특징이다. 때문에 모든 가전회사가 MSX 컴퓨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 컴퓨터의 하드웨어 규격을 공개한 이유는 이 두 업체가 하드웨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는 전 세계 기업이 생산하고 두 기업은 어떤 MSX 기종에서도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해 수익을 얻겠다는 것이 전략이었다.

설계에 참여한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IBM-PC용이던 베이식, C, 코볼, 멀티플랜, PC-DOS 등을 MSX용으로 수정해놓은 상태였다.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하드웨어가 판매되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는 MSX를 가정용PC라는 주제로 접근시킨다. 그래서 ‘홈 퍼스널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MSX를 홍보했다. 일본이나 한국의 가전회사들이 MSX 생산에 뛰어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전략은 예상대로 진행되어 표준규격 발표 3개월 만에 미국과 일본에서 50여 개의 하드웨어업체가 MSX를 생산하는 성과를 거둔다. 국내에서도 1983년 11월부터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이 MSX 생산에 뛰어들었고, 1984년 3월부터 제품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가전 3사의 힘 덕분에 MSX는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몇 년 동안 학생들의 최고 인기 품목이 된다. 그러나 IBM-PC가 교육용 PC로 결정되면서부터 MSX와 애플은 빠르게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잠깐] 8비트 키드가 IT 주역으로 등장할 때는 모두 20대

1980년대 학생이던 8비트 키드가 IT 주역으로 등장한 시기는 1990년을 전후해서다. ‘아래아한글’의 이찬진, ‘한글2000’의 강태진, V3의 안철수, ‘한메타자교실’의 김성수, ‘한글도깨비’의 최철룡, ‘이야기’의 이영상 ‘폭스레인저’의 남상규, ‘퓨처 TCP’의  김광태 씨 등이 모두 20대에 역사에 남을 프로그램을 가지고 등장했다. 이들 대부분은 386 세대라 부르는 60년대 생이었고, 80년대에는 10대였다. 그래서 8비트 영맨이라는 말은 없고 8비트 키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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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21 08:46
네티즌과 전면전이 펼쳐진 KT의 인터넷 종량제 논의

‘인터넷종량제’ 문제로 온라인 세계가 한동안 시끄러운 적이 있다. ‘인터넷종량제’란 ‘인터넷 사용시간이나 자료 전송량에 따라 초고속통신망의 사용 요금을 부과하는 제도’로 현재 시행 중인 인터넷 정액제의 반대 개념이다. 인터넷종량제가 실시될 경우 사용자는 인터넷 사용량에 비례해 돈을 지불해야 하므로 돈이 없는 사람은 인터넷 사용을 줄여야 한다.

지금까지 KT가 실시하고 있는 요금제는 매달 3~5만원 사이의 금액을 받고 있는 월정액제다. 인터넷종량제에 대한 논의는 KT가 민영화된 후부터 수시로 나왔던 이야기인데, 몇 차례 이야기가 나왔다가 2004년 4월에 KT가 초고속인터넷 요금을 변경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부터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3월 10일에 진대제 정통부 장관이 “인터넷을 자주 쓰는 상위 5%의 네티즌이 전체 트래픽의 40%를 차지해 상대적으로 덜 쓰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 통신사업자들의 의견이 접수되고 공론화되면, 공청회를 거쳐 정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며 KT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3월 23일에는 이용경(李容璟) KT 사장이 직접 “종량제 도입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밝혔다. 이어 3월 27일에는 이용경 사장이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종량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글을 직접 올려 종량제 실시 의지를 확실하게 밝혔다.

이용경 KT 사장이 자신의 블로그(blog.paran.com/lyk)에 밝힌 종량제 의견

종량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네티즌은 종량제의 문제점을 꼬집은 패러디물을 대거 등장시켰다. 최근에는 영화 ‘본콜렉터’의 장면을 편집한 풀빵닷컴의 '돈콜렉터'라는 동영상이 네티즌 사이에 화제를 모았다. ‘돈콜렉터’를 보면 쓰는 만큼 돈을 내야 한다는 KT측 주장을 신문기사로 보여준 다음에, "누가 사이트에 동영상을 올려놓았어" "4000만 국민 인터넷 무료교육 시켜놓고 중독되니까 돈을 올리시겠다" "돈 있는 놈만 정보 습득할 수 있는 세상" 등의 자막으로 종량제를 풍자한다. 네티즌의 특기인 패러디 합성사진도 많이 퍼졌다. 최근에는 텍스트로만 구성된 포털사이트 NEVER 화면이 인기를 얻으며 공감을 얻었다.

인터넷은 날이 갈수록 생활에 밀착하며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종량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인터넷을 사용 안 할 수는 없다. 또한 사용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자료 전송량이 주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 자료는 날이 갈수록 고용량의 멀티미디어로 바뀌고 있다. 가로 100픽셀 수준의 동영상은 VCD급을 거쳐 현재 DVD급까지 변화했고 최근에는 HD 급의 고해상도로 바뀌고 있다. 또한 지금은 일반인들이 뉴스 사이트를 주로 보다가 어쩌다가 파일을 받는 정도로 인터넷을 사용하지만, 앞으로 교육방송을 비롯한 TV방송 등을 인터넷으로 보게 되면 상황은 역전된다. 어쩌다 프로그램을 받으며 사용하는 전송량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루 종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자료 전송량이 줄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저용량 위주의 인터넷 환경으로 바뀔 수는 없다. 특히 고소득층은 종량제가 실시된다고 해서 인터넷 환경을 저용량 환경으로 바꾸지 않는다.

종량제 이후의 포털 모습을 만들어 올린 패러디물. 그림 파일은 하나도 안 보이고 모두 텍스트로만 구성된 차림표로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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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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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비즈북스 2010.12.10 08:57
두루넷과 하나로가 초고속통신망 서비스를 시작하다

믿기 어려웠던 초고속통신망 광고

56Kbps 모뎀을 겨우 지원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TV에 초고속통신망 광고가 등장한다. 탤런트 권해효 씨가 권투를 하다 쓰러지는 두루넷 광고와 금난새 씨가 지휘를 하자 아름다운 선율이 각 가정 위를 흐르는 하나로통신 광고였다. 처음 이 광고가 등장했을 때 나는 10Mbps가 넘는 속도로 인터넷을 쓴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몇 년에 한 번씩의 간격으로 두 배씩 올라가던 속도가 갑자기 수백 배로 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런 속도가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비쌀까 싶었다. 그런데 10Mbps가 불과 ·4만 원 선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당시 56Kbps 전용선이 50만 원 전후였고, E1 T1급 회선이 수백만 원을 넘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4만 원 정도로 메가급 이상의 속도가 나는 회선을 쓴다는 것은 쉽게 납득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1999년 5월, 관악구에 유일하게 하나로 ADSL이 들어온다는 센추리 오피스텔로 이사를 해서 직접 사용해봤다. 그리고야 깨달았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그림 하나 화면에 뿌리는 데 몇 분씩 걸리는 답답한 인터넷의 시대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두루넷(www.thrunet.com)의 1998년 초고속통신망 광고


ADSL 이전에 KT에서 밀었던 것은 ISDN
케이블과 ADSL 이전에 정부 및 한국통신이 밀었던 통신망은 ISDN이었다. 1993년 12월 29일에 한국통신(KT)은 ISDN(종합정보통신망)의 상용 서비스를 시범 개시했다. ISDN서비스는 전화선 하나에 8대의 통신기기 연결이 가능하고, 2회선을 이용해 2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속도는 기존 56Kbps 모뎀보다 두 배가 넘게 빠른 128Kbps를 지원했기 때문에 ‘꿈의 통신망’으로 부르며 언론에서 크게 보도했고, PC통신 사용자들의 기대도 컸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보급에는 난항을 겪었다. 몇 년 후 한국통신은 ISDN-II를 다시 내놓고 최지우, 김민종 등 유명 탤런트까지 동원해 TV광고와 지면 광고를 집행했으나 이때는 ADSL 등의 초고속인터넷망에 밀려 결국 실패한 방식으로 사라졌다.

유명 탤런트까지 동원해 광고했지만 보급에 실패한 ISDN


두루넷과 하나로가 초고속통신망 서비스를 시작하다.

ISDN의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 1998년 7월 1일, 케이블TV망을 이용한 초고속통신망 서비스인 두루넷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56Kbps 모뎀시대에서 갑자기 수십 수백 배 빠른 초고속인터넷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IT강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어서 1999년 4월부터는 하나로 통신에 의해 세계 최초의 ADSL서비스가 시작된다. 같은 해 6월에는 한국통신이 ADSL 시범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초고속인터넷 상용서비스 시대가 열렸다. 이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2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4인 가정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마다 1회선이 깔린 셈이다.

한국통신은 ISDN을 포기하고 1999년 12월부터는 ‘메가패스’란 상품명으로 ADSL 서비스를 시작하며 2000년 밀레니엄 시대에는 밀레니엄 마케팅을 한다는 3M 전략을 들고 나왔다. 2000년 안에 100만 가구 가입을 목표로 한 것이다. 한국통신은 예상보다 빠른 2000년 9월에 가입자 100만 명을 넘어서고 연말에는 185만 명을 달성한다. 이에 따라 2000년 말에는 국내 초고속통신망 가입자가 300여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20002년에는 데이콤, 온세통신, 드림라인까지 초고속통신망 사업에 뛰어들어 더욱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2002년 10월에는 국내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한다.

CJ드림의 드림엑스 서비스

한국인터넷진흥원의 ‘2008 한국인터넷백서’에 따르면 2007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1471만 명으로 전체 가구의 약 90%에 가까운 가입률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100명당 가입자 수는 29.9명으로 4인 가구 기준으로 대다수 가구에 이미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된 상태가 되었다.

또한 2002년 8월부터는 13Mbps급의 VDSL을, 2004년 12월부터는 50Mbps급의 VDSL을 시작했다. ADSL의 경우 전화국에서 5.5Km까지 서비스가 가능하지만, VDSL은 2.5Km까지만 가능하며 최대 속도는 300m 이내에 가입자가 있어야 한다는 제약사항이 있었지만 기존 전화선으로도 광가입자망통신(FTTH)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었다. 2007년 12월 기준으로 50Mbps 이상의 속도를 보이는 가입자가 701만여 명으로 47.7%를 차지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FTTH로 교체되고 있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회선으로 인터넷을 즐기는 나라가 되었다.


[잠깐] ISDN에서 ADSL로 넘어간 이유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속통신망 국가로 성장하면서 인터넷 인프라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ADSL의 보급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가 1998년에 ADSL을 초고속 인터넷 표준으로 채택한 것에는 당시 정통부 장관이던 배순훈 장관의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ADSL은 반경 5킬로미터를 넘어가면 통신 속도 및 안정성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단점 때문에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인터넷 회선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던 기술이다. 그러나 배순훈 장관은 한국의 경우 전화국 반경 5킬로미터 이내에 대부분의 가구가 있기 때문에 기존에 깔린 전화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ADSL을 통해 초고속망 도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10년 뒤의 광케이블(FTTH) 보급 전까지는 ADSL로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ISDN 대신 ADSL를 채택했다. 반면 독일과 일본은 IDSN을 선택함으로써 느린 회선으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IT사100파콤222에서미네르바까지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영전략 > IT경영
지은이 김중태 (e비즈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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